HOME                로그인
행복속에 살면서 행복을 몰랏다.
정인환 (aaaa3657)
2013/04/03  18:21 1267

                       행복 속에 살면서 행복을 몰랐다.

 

어디서 귀동냥한 말이다 “행복은 가진 것을 누리는 것이고 불행은 갖지 못한 것을 탐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못 가진 것을 어떻게든 채워서 행복을 누리려고 악착같이 살아간다. 누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있을까마는 특히 우리 같이 80대의 늙은 세대들은 더 그렇다. 그 세대들은 거개가 헐벗고 굶주리며 못 먹고 못 입고 못 배웠다. 그리고 궂은일 다하며 가장 불행한 시대를 살아왔다고 여긴다. 나는 유복裕福하게 살았다고 말할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 세대는 이름도 성도 말까지 빼앗기는 일제의 압제를 받으며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다. 생명을 부지하려고 수수백년 살아온 고국을 떠나 남의 땅의 황야를 개척하며 방황도 하였다. 그러다 조국 광복을 맞았으나 좌우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전쟁 못지않은 고난도 겪었다. 또 전쟁의 참화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이산離散의 슬픔은 뼈 깎는 아픔이었다. 폐허의 터전을 복구하고 유구한 세월, 숙명으로 물려받은 보릿고개를 허문 것도 이들 세대다. 또 원동기 하나 못 만드는 기술로 이룩한 산업화는 그들의 피땀의 결정체요 그들의 긍지다.

 

내 땅, 한 뼘 없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주린 배 채우려고 북만주로 이주하여 여덟 살 철부지에 어미님을 여의고 계모슬하에서 자랐다. 조국광복으로 빈손으로 귀국하니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술 밥 얻어먹으려고 남의 집 꼴머슴으로 팔려갔다. 한창 성장하며 배울 어린나이에 어깨가 짓뭉개지도록 지게를 지고 손발이 터지도록 풀을 베고 밭을 맸다. 또래들은 학교에서 서당에서 공부할 때, 나는 산과 들에서 구슬픈 수심가를 교가처럼 불러댔다.

 

나는 42개월간 군복을 입었다. 남들은 군복이지만 내게는 학생복처럼 입었든 제복을 벗으니 배움도 없지만 빽도, 돈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막노동뿐이다. 막노동이라도 할 곳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맨주먹이라도 신접살림은 차려야 했었다. 헛간채 부엌도 없는 문간방을 얻어 신문지로 도배하고 벽에 못 박아 옷 걸고 횃댓보 덮으니 아늑한 신 혼방이 되었다. 사과상자에 사발두개 수저두벌 냄비 한 개를 올려놓으니 찬장이 되었다. 부지깽이도 소중하고 행복한 내 살림이었다.

 

이른 봄, 노동으로 몇 푼의 돈을 모아 방천시장에서 항아리 하나를 샀다 새끼줄로 멜빵을 해서 메고 수성교를 건너 오성학교 앞 제방 둑길로 중동을 거처 우리 집까지 오는데, 차가운 날씨에 심술궂은 바람은 단지 주둥이로 들어가니 단지는 무거워져 내 몸을 비튼다. 20대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부끄럼도 잊고 콧노래 부르며 온 그때가 행복했었다.

 

나의군대생활 3년 반은 누구처럼 젊음을 썩힌 기간이 아니라 배움의 기간이었다. 나는 정규학교라고는 2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군에서 사무직으로 책상에 앉아 복무한 것은 주경야독으로 주워 모은 지식? 덕분이다. 활자로 된 글씨는 전부 나의 교과서였다. 그렇게 청탁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지식으로 직장을 얻었어도 많이 배운 학부 출신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걸었고 목적지까지 순탄하게 닿았으니 은총이요 남보다 더한 행복이다.

 

내가 살림을 차린 곳은 지금의 한샘교회서쪽 두산동이다. 그때 일용직으로 대한지적협회에 취직했다. 정부산하기관이기 때문에 소관청에 같이 있었다. 처음, 소관청은 동부세무서였으나 5.16으로 세제가 개편됨으로 62년부터 대구시청이 소관청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8㎞가 넘는 거리지만 눈비가 와도 출퇴근은 도보徒步였다.

 

매일 야근을 하다 보니 퇴근은 언제나 늦은 밤이다. 배도 고프다. 식당마다. 내 뿜는 음식냄새를 맡은 빈창자는 꼬르륵 꼬르륵 슬피 울어댄다. 또 여름날 늦은 밤, 퇴근길에 내 눈에 비친 집들은 행복했다. 전등불 훤히 밝혀놓고 탁자 앞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고 담소하는 그림, 나도 언젠가 그려보고픈 행복한 그림이다. 그러나 그 속에도 한두 가지 근심걱정 왜 없었겠나.

 

나같이 못 배운 사람도 공무원으로 봉직하고 공공기관에 근무할 수 있었든 것은 그 시대는 그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인데 어찌 불행한 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또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록 남같이 못살아도 던지는 밑밥에 참기 어려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힘은 내가 남보다 못 배우고 가난하고 믿을만한 배경이 없기 때문에 정년까지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조심조심 근신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뒤돌아보면 가난하고 못 배운 게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없다고 여겼다. 노래를 불러도 슬픈 노래만 불렀다. 이제 철이 들어 생각하니 그게 아니다. 내가 만약에 부잣집에 태어나, 아쉬움 없이 자랐고 많은 유산을 받아 호화롭게 살았더라면 오늘의 이, 행복의 맛을 맛볼 수 있었을까? 헛간채 문간방, 한데 부엌에서 시작한 살림살이가 자그마한 내 집을 마련했을 때 느낀 그 행복 누구도 맛 못 본 나만의 행복의 맛이었다.

 

아들딸 5남매 탈 없이 건전하게 성장해서 나름대로 배우고 부모 걱정 안 시키고 사회생활 성실하니 고맙다. 내 손자소녀, 하나같이 건전하고 성실하게 자라서 제자리 바르게 지켜주니 기특하고 행복하다. 또 늙은 우리 내외, 큰 탈 없이 아내가 해주는 밥 먹고 아직까지 자식들 큰 짐 안 되게 살아가니 이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못 배웠기 때문에 80늙은이가 문단에 등단해서 그, 한을 푼 감격이 그만큼 컸었지, 많이 배워 석사 박사였다면 그 같은 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믿음을 시작한지 불과 반년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빛> 잡지와 평화방송이 공동주최한 신앙수기 공모에 비록 가작이지만 대구 경북에서 많은 응모작품 중 에세 채택되었으니 늙은이로서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비록 오늘 가난하다해도 불행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하면 오두막집 도 편안하고 성정이 어질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하지 않았나. 백을 가진 자가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이 남았는데도. 불행타 한다. 하나밖에 못가진자가 하나를 더 얻으면 둘이 된다. 그래도 행복타 한다. 행불행 은 곧 마음 이다 수백마원짜리 만찬을 대접받는 사람이 행복한가? 다정한 친구와 주막집 평상에 앉아 조건 없이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행복한가?

 

생명(生命)이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철칙이다. 천주교 대구교구청 성직자 묘역에 “오늘은 내가 죽었지만 내일은 네가 죽을 것이다.” 란 문구가 있다. 영생을 꿈꾸든 진시황의 불로초도 죽음은 피하지 못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두 손 불끈 움켜쥐고 태어났지만 갈 때엔 두 손 펴고 간다. 생명은 억만금으로 살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왜 그렇게도 억척스럽게 긁어모으며 악착같이 살아야하나 이만큼 살아온 것 행복했다. 감사해야지 수의에는 주머니도 없다는데……

 

과거에 급제함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황희정승은 재상으로24년에 18년을 만인지상인 영의정까지 지냈으면서도 비가 새는 초가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지금의 높은 소위 지도자들은 그를 무능한 탓이라 욕 할지도 모른다. 현재 소위 지도자들이 거친 곳에는 시궁창 썩은 냄새 안 나는 곳 없으니 역겹다. 지나치면 욕이 된다. 저~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충격도 그만큼 컷을 것이다. 그렇게 당당하든 그 가 고개 떨어트린 모습 보니 큰 벼슬 못한 내가 오히려 감사하다.

 

내 주위 사돈의 팔촌까지 청문회 나가 집안 망신시킬 인물 없어 다행이다. 교도소에 갈 만큼 뇌물 받아 축재할 고위직 친인척 없어 다행이고 탈세해서 재산압류당한 형제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평생을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는 안타까운 광경을 보며 난, 비록 자식들께 물려줄 재산 없지만 욕된 빚의 유산 안 남기고 살아온 내가 행복 속에 살면서 이때껏 행복을 몰랐었다

 

 

주소: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1252-14

소속: 대구 두산성당

이름: 정인환 (바오로)

전화: 010-6503-3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