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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기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며


글 이관홍(바오로) 신부|가톨릭근로자회관 부관장

 

이주 사목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전 세계 각지에 많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주민들과 소통하는데 주로 사용하는 SNS를 통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뉴스보다 빠르게 실시간으로 전해듣기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날씨가 어떤지, 대서양의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직접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도 소식을 전해주고, 안부를 묻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바로 외항 선원 친구들입니다.

 

2012년 9월, 포항 죽도성당에서 보좌신부를 하면서 이주사목을 겸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성당 문 앞에 낯선 필리핀 사람 4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 한명은 머리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심하게 다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필리핀 사람이냐고,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외항 선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노르웨이에서 화물선을 타고 출발했고 포항에 잠시 정박하여 화물을 싣는 중이며,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라고 했습니다.

 

머리와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친구에게 왜 다쳤냐고 물어보니 전혀 의외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뜬금없이 배가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실인즉 노르웨이에서 진수식만하고 시간에 쫓겨 축복식은 하지 못하고 포항으로 출발했는데, 포항으로 오는 몇 달 동안 배에서 크고 작은 사고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30여 명의 필리핀 선원들 모두 축복식을 하지 않아서 사고가 일어났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포항에 정박하는 동안 꼭 축복식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던 도중 사고가 나서 머리와 손을 다쳤다고 했습니다. 포항항에 정박한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바로 축복식을 해줄 수 있는 사제를 찾아 성당을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배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축복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필리핀 선원들의 신앙을 두고 미신적이고 기복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필리핀에서 외항선원들과 그 가족들의 어려움을 직접 들었던 경험이 있기에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외항선을 타게 되면, 적어도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6~7개월 동안 항해를 하게 됩니다. 외항 선원들은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긴 항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고, 본국에 있는 가족들은 행여나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축복식이나 선상 미사가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저는 포항 지역에서 이주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신부라고 저를 소개하고, 배 위에서 미사와 축복식을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출항 이후 몇 달 동안 한 번도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고 너무 좋아했고, 포항에 와서 어렵게 성당을 찾았는데 성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연히 저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항만청에 승선요청서를 작성하고,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모상을 선물로 준비해서 항구로 향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배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걸어올라 배에 올랐고, 선장을 비롯해서 30여 명의 선원들이 모두 갑판에 나와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타갈로그어로 입당 성가를 부르면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짧은 강론 후에 축복식을 시작했습니다. 축복기도문을 읽고 성수를 뿌릴 때가 되어 저는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가 모두 10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층부터 기관실, 엔진, 30개가 넘는 선원 침실, 식당, 그리고 축구장 3개 크기 정도 되는 갑판까지 빠짐없이 구석구석 성수를 뿌려달라고 했습니다. 행여나 제가 성수를 꼼꼼하게 뿌리지 않을까봐 선장님은 저를 따라다니면서 성수가 뿌려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성수를 뿌려달라고 했습니다. 작은 성수통을 하나만 준비했던 저는 난감했습니다. 성수가 떨어졌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소금과 물을 가지고 와서 성수를 축복해서 뿌려달라고 했습니다. 성수를 뿌리는데만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준비해 간 성모상을 선장님께 전해주면서,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이 배와 선원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했더니 모두가 성모상을 어루만지며 기뻐했습니다.

 

몇 달 뒤, 축복식이 효과(?)가 있었는지 미국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SNS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파도가 높거나 바다 날씨가 궂은 날이면 선원친구들이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 후 저에게는 두 번이나 더 화물선을 축복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성수를 많이 준비해가지 않았던 처음의 실수(?)를 거울로 삼아 매번 엄청난 양의 성수를 미리 준비해갔고, 선원들이 원하는 곳에 듬뿍듬뿍 성수를 뿌려주었습니다.

    

가끔씩 제가 직접 축복한 거대한 화물선들이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다는 생각에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보다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외항선원들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축복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에 저는 사제로서 더 큰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지금도 외항선원 친구들은 파도와 바람, 그리고 외로움과 싸우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그 친구들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외항선원들에게 안부 메시지라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