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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기
His eminence? enemy?


글 이관홍(바오로) 신부|가톨릭근로자회관 부관장

  매 주일 오후, 대안성당 마당에는 많은 이주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바로 2시 영어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필리핀 이주민들과 4시 베트남 미사를 준비하는 베트남 이주민들입니다. 저는 2시 영어 미사를 봉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필리핀 이주민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미사를 기다리고 있는 베트남 이주민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필리핀 이주민들과는 영어나 타갈로그어로 인사를 나누고, 베트남 이주민들과는 한국말이나 베트남 인사말인 “씬 짜오.”라고 인사합니다.

베트남 이주민이든 필리핀 이주민이든 이주민들과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때 종종 재미있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한번은 스리랑카에서 온 건장한 체격의 남자 이주민이 치과 진료를 받으러 왔는데 수단을 입고 있던 제가 신기하게 보였는지 저에게 “오빠! 저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웃음도 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빠라는 말은 여자들이 쓰는 말이에요.”라고 말했더니 얼른 “아~형님!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요.”라고 했습니다.

대안성당의 주일미사에 매주 열심히 나오는 한 베트남 이주민은 저를 보면, “신부님, 잘 있었어? 밥은 먹었어?”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어떻게 지내요?”라고 물으면 “아~힘들어. 요즘 야근 많아. 많이 힘들어.”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반말을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누구에게나 한국말로 반말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을 충분히 배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존댓말이 어려운 이유도 있으며, 일하는 공장에서 자신이 듣는 말이 항상 반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로 이주를 하든 이주민들이 겪는 첫 번째 외적인 어려움은 바로 ‘의사소통’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수를 하고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기기도 합니다. 저도 필리핀에 있을 때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필리핀에 도착한 지 한 달 반 정도 지났을 무렵, 제가 살던 스칼라브리니 수도원에 마닐라교구 추기경님이 오셨습니다. 수도원의 모든 식구들이 한 줄로 서서 추기경님 반지에 친구를 하며 추기경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모두들 추기경님을 “His eminence”라고 부르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생소한 단어였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 입에서는 “His enemy”라는 말이 불쑥 튀어 나왔습니다. 추기경님께 사용하는 존칭은 ‘His eminence’인데 저는 추기경님을 ‘적 또는 적대자’라는 뜻의 ‘enemy’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순간 저도 제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당황스러워 금세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언제, 왜 필리핀으로 오게 되었는지 물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필리핀에 온 지 한 달 반 정도 되었고 이주사목을 공부하고 한국에 있는 이주민들, 특히 필리핀 이주민들을 사목할 예정이라고 서툰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한국에 있는 필리핀 이주민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고맙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enemy’라고 부른 것을 사과드리니 당신도 한국말을 못한다고, 괜찮다고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주민들과 대화를 할 때 서툰 한국말을 들을 때면 항상 그들의 모습에서 저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때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추기경님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이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저는 ‘말’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주민들과 대화를 할 때는 한국 사람과 대화할 때보다 더 집중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을 때 한 단어 한 단어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대한 천천히, 쉬운 단어로 또박또박, 중요한 단어들은 몇 번이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말이나 글로 완벽한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해할 때도 있습니다. 지친 표정, 슬픈 표정, 기쁜 표정이 수없이 많은 말들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도 있고, 소위 ‘바디 랭귀지(Body laungage)’라고 하는 손짓, 몸짓을 통해서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주민들의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지친 표정을 봅니다. 그럴 때는 백 마디 말보다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함께 기도하겠다는 짧은 한 마디가 더 큰 위로가 됨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쉴 새 없이 유창하게 많은 말을 쏟아내시기 보다는 때로는 침묵으로, 어루만짐으로, 손을 잡아주심으로 많은 말들을 대신하셨습니다. 이주민들 역시 말은 통하지 않아도 자신을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고 배려해 준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감사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침묵으로, 손짓으로, 또 표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한국에서 살아가니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들의 갑갑한 마음, 답답한 심정을 헤아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말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