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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부진아


글 박경현(프란치스코)|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운동회는 나에게 결코 축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체육시간도 나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수업이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10리가 넘는 거리를 매일 등하교 한 것이나 산골의 외딴집에 살면서 집 주변의 산을 놀이터 삼아 헤집고 다니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는 체질적으로 허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키와 몸집도 작은 편이 아니고 다리도 조금 긴 편이어서 운동을 잘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체육시간과 운동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몸이 뻣뻣하고 무거웠으며 하체에 비하여 상체가 약한 체형이라는 약점들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체육시간을 가장 싫어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달리기’때문이다. 서열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나보다 앞서가는 아이들이 뒤에 오는 아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자존심과 승부욕은 강한 아이였는지 나는 이런 서열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겉으로는 일일이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수치심을 오랫동안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를 알아보는 동네의 어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는 나에게 늘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운동회에 부모님이 오는 것을 만류하기도 하고 달리기 종목 때 빠지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차라리 운동회 날에는 비가 오거나 몸이라도 아팠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2학년 때에는 운동회를 위한 덤블링을 연습하다가 팔을 다쳐 메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이 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달리기에서 1, 2, 3등으로 도착한 승자들은 도우미들이 등위를 나타내는 커다란 숫자가 적힌 깃대를 들고 뛰어 와서 수상자들의 대기 장소로 안내한다. 그곳에 모여 있는 아이들은 개선장군처럼 요란한 축제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청백대결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등위 밖 아이들은 서둘러 치워내야 하는 장애물처럼 취급되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달리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종 기계 운동이나 구기종목에서도 나는 부진아였다. 뜀틀수업을 하는 시간에도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뜀틀을 안고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선생님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아니면 ‘방금 못 넘은 것은 실수일 뿐 자신감을 가지고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등의 격려가 있었다면 덜 부끄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등신 같은 놈,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고….” 혀를 차면서 내려다보던 선생님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창피함과 미안함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모래밭에 처박힌 몸을 세우며 내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너진 뜀틀을 서둘러 수습하고는 아이들 속으로 꽁무니를 감추며 숨어들었다. 정말 완벽한 자세로 멋지게 수행하여 아이들의 환호를 받는 장면을 수없이 꿈꾸었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냉정했고 나는 다시는 뜀틀 앞에 서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중·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농구며 축구며 이런 종목에 함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로 인해서 경기를 망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혹시라도 실수를 하여 망신을 당할 것 같아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면서, 거리낌 없이 아이들과 뒤섞여 소리치며 뛰놀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지우고 있었다.

이처럼 나는 운동에 관해서는 철저한 부진아로 스스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학을 위한 체력장 검사가 있을 때 내 생각과 다른 나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학년 초만 하더라도 나는 푸줏간에 걸어둔 고기 덩어리와 비슷한 운동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신체적 기능이라기보다는 심리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입시에 영향을 주는 체력검사가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 시절의 체육선생님의 독려가 큰 힘이 되었다. “안 되는 사람은 없다. 못한다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다.” 다소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누구나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말에 용기를 낼 수가 있었다. 이를 악물고 틈틈이 연습한 결과, 내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현실이 되었다. 턱걸이,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100m달리기, 오래달리기 등 각 종목에서 친구들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더 낯선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높이뛰기 수업을 하면서 배면뛰기 자세에서 교수님이 자세가 좋다고 시범을 보이라고 했다. 살다 살다 참 별일이 다 있었다. 그리고 뜀틀운동을 할 때에도 요령을 알고 보니 높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경험했다. 운동조차도 즐기지 못하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체육의 부진아로 만들었던 것이다. 운동이나 공부나 글 쓰는 재주나 모든 것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능력 중의 하나인 것이다. 공부 중에서도 각 과목별 재능이 다른 것이다. 모든 분야를 골고루 잘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잘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들이 학습의 즐거움을 모조리 앗아가고 많은 아이들을 강요와 상처로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학습 능력을 수치화하여 나타내는 것 중에 I.Q(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라는 지수가 보편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새로운 지식을 빨리 습득하고 민첩한 대응이 필요했던 사회에서는 학습능력이 중요시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추리능력, 언어이해력, 수리능력, 어휘력, 기억력, 공간지각능력 중심의 I.Q에 대해 사람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 지수의 의미를 알고 보면 조금은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지수가 100이라는 말은 같은 또래 아이들과 이해의 속도가 비슷하다는 뜻이고 100보다 높으면 빠르고 100보다 낮으면 느리다는 것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다. 절대적인 능력이 아니라 습득의 속도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다. 이해의 속도가 늦는 것을 우리는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고 정의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학습의 결과를 점수화하고 이 점수가 진학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평가를 위하여 깊은 사고력을 측정하기 보다 문제풀이의 시간을 제한하여 순발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이 안고 있는 숙제이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들이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풀기 위해 반복해서 연습하는 입시 공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공부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나오고, ‘교육 때문에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한 선행학습에 대한 수요로 사교육이 기형적으로 범람하고 ‘교육’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고력과 창의력보다는 평가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한 수업에 초점을 맞추면서 부진아 아닌 부진아들이 양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사람의 능력을 뭉뚱그려 하나의 숫자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분야별로 측정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적능력뿐만 아니라 8가지 분야별로 구분하여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다중지능검사가 그것이다. 인간친화지능, 언어지능, 수학논리지능, 신체운동지능, 음악지능, 공간지능, 자연지능, 자기성찰지능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대학진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학습 부진에 대해서는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친화능력’이나 ‘자기성찰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적 지상주의가 빚어낸 수많은 부작용들을 접하면서 늦었지만 대학입시도 성적 중심에서 학교생활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들이 명문대학만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교육선진국들의 공통점은 입시제도나 일류대학 진학에 매달리기보다 확고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잠재능력 계발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한 경쟁보다는 협력과 공존에 치중하여 수월성 교육과 영재교육을 아예 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뿌리교육, 경쟁보다 지혜를 키우는 교육, 더불어 사는 교육, 남보다 뛰어나기 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남과 다른 능력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하여 발휘하도록 하는 공동체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물질적 여건은 세계 최고의 만족도를 보이지만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최하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를 냉정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어른들이 만든 가치관을 강요한 것이 한 몫을 했다. 수포자(수학포기자), 영포자(영어포기자) 등도 비교와 서열을 중시하는 우리의 교육풍토가 만든 부작용이다.

체육을 즐길 수 있는 학습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야 한다고 가르치고 아이들의 성장속도와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나처럼 체육에 대한 울렁증을 가진 아이들을 만든 것이다. 경쟁위주 교육의 결과가 극단적 이기주의와 우울증 등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교육은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성장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교육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수함을 발견하여 즐겁게 몰두하는 체험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이며 그 누구도 우월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로움을 겪고 있는 ‘부진아’는 우리들의 교만함과 부족한 사랑이 만든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부진아는 없다, 다만 이해의 속도가 느린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