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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성지
어농성지, 주문모(야고보) 신부와 강완숙(골롬바) 회장


글 박정길(마르코)|형곡성당

   

강완숙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골롬바’로 세례를 받았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여회장에 선출되어 다양한 계층의 많은 사람을 입교시키는 한편 교회의 여러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골롬바는 주 신부가 교우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집으로 피신해 오자 얼른 광에 숨겼다. 광은 곡물을 비롯하여 각종 물건을 넣어두는 곳간(庫間)을 말하는데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광이었으나 위장물 안쪽에는 숙식이 가능한 자리와 처소가 잘 꾸며져 있었다. 골롬바는 이런 날을 예상하여 피신처 마련에 고심했으나 장소가 마땅치 않자 할 수 없이 임시 거처를 광으로 정하고 틈틈이 꾸며 두었던 것이다. 믿음 약한 남자 교우들도 잡혀가 죽을까봐 몸을 사리는 마당에 체포령이 내려진 신부를, 그것도 여인의 신분으로 숨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은 어떤 인물인가

강완숙은 1760년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지혜가 뛰어났고 성격이 활달한데다가 구변이 좋았다. 매사에 출중했으나 ‘서녀’라는 이유로 공부를 할 형편이 못 되자 공부하는 오빠들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하나하나 주워 들으며 글을 깨우쳤다고 하니 오빠들보다도 훨씬 더 영특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불교에 뜻을 두고 불경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책장을 덮으며 하는 말이 ‘허무’를 느꼈다 하였고, 마태오 리치 신부가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 책을 보자 감명을 받고 단숨에 읽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일찍이 충청도 덕산(德山)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전처의 소생을 친아들처럼 잘 보듬어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1791년 진산사건(제사폐지)으로 나라 안이 떠들썩하면서 천주교 교우들이 하나둘 잡혀가자 그녀는 밥을 해서 몰래 옥에 넣어주고 옥에 갇힌 교우들을 보살펴 주다가 간수한테 잡혀 며칠간 감금되었다 풀려난 적도 있었다. 평소 강완숙의 열렬한 입교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던 남편 홍지영은 후환이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헤어져 살자고 했다. 강완숙이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洪弼周)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시어머니와 아들도 같이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아들과 아버지를 버리고 선뜻 따라나선 모자를 보면 그녀가 평소에 지혜롭게 처신하면서 애덕실천을 얼마나 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서울로 올라온 골롬바는 거처를 잡아 여러 교우를 만나 친교를 나누면서 사제영입을 위해 애쓰는 교우 가정에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다.

골롬바는 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신부를 보살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대접하는 것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대문 밖에는 나졸들이 신부를 잡기 위해 잔뜩 독이 올라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숨어 지낼 수 없자 주 신부는 골롬바와 자주 상의하여 사목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위험을 무릅쓰고 여회장 골롬바를 따라 거리로 나오자 예상했던 것보다 검문검색이 심했다. 변장을 잘했으나 긴장이 되자 손안에 땀이 흐르고 머리끝이 주삣 서는 절박한 순간을 자주 겪었다. 그때마다 골롬바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잘 넘겼다.

신부를 숨긴 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광에 더 모실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몸져누워 식음을 전폐했다. 시어머니가 의원을 부르려 해도 거절하자 마음의 병임을 금방 알아차린다. “너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나 굶어 죽으려 하니 나도 살 이유가 없다.”며 따라 죽겠다고 자리를 펴고 눕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그녀는 이틀을 더 굶었다. 시어머니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따라 굶었다. 골롬바는 이 정도면 믿어도 되겠다 싶어 눈물을 흘리며 속말을 내놓았다. “중국에서 우리를 사목하기 위해 신부님이 오셨는데 조정에서는 신부를 못 잡아 난리고 우리에게 영적 양식을 주는 그 신부님이 잘 숨어 계시는지, 뭘 드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제가 어찌 밥이 넘어 가겠습니까?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시어머니가 벌떡 일어나며 반문했다. “너를 대단한 여자로 봤더니 이게 뭔 말이냐?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 우리 집에 모시면 될 것 아니냐!” 골롬바는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굳게 잡았던 시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놓으며 너무 기뻐 신부를 집 안으로 모실 채비로 바빠졌다.

 

6년 동안 주문모 신부를 모신 강완숙(골롬바) 회장

차츰 자리가 잡히면서 주문모 신부가 만든 명도회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명도회는 북경에서 하던 회(會)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초대회장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중심으로 황사영, 홍필주 등은 명도회 하부조직인 육회(六會)의 책임자로 교회의 기틀을 놓는 한편 북경교회와 조선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모색하고 교회발전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여회장 골롬바는 대담하게 신부를 모시고 나가 지방순회 사목을 하고, 치밀하게 숨겨 들어오는 것을 반복했다. 중국인 신부를 체포하려고 좌포청, 우포청의 나졸들이 들끓는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지나가는 두 분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긴장감이 돈다. 이처럼 골롬바의 수완과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5년 만에 1만여 명이 되었다. 그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과 머슴, 하녀들도 있었으며 왕실의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처녀 교우들이 많아지자 ‘동정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아마도 한국 최초의 수녀원이 아니었나 싶다.

 골롬바는 주 신부를 모시면서 비밀 유지를 위해 이사를 여러 차례 했는가 하면 특히 신부를 찾아오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늘 경계하며 신경을 썼다. 그중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소문을 듣고 신부를 만나 성사를 보려고 80리 길을 걸어 왔으나 골롬바는 그가 교우인지 밀고자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신부가 안에 계시는데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대답 대신 고개로 의사 표현을 했다고 한다. 신태보는 실망하지 않고 그 후에도 일곱 번을 더 찾아왔지만 결국 주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 ‘대체 나와 무슨 감정 있어 이러는 거요?’ 하며 대판 따질 만도 한데 그는 아무 원망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신태보는 약 40년 후 교회 서적을 필사해서 나눠주고 성직자 영입에 따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체포되어 12년 옥살이로 전주에서 순교하여 복자품에 올랐는데 당시 70세였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 신유대박해로 많은 교우가 잡혀갔다. 취조를 통해 골롬바가 주 신부를 숨겨온 사실을 알아낸 포졸들이 그녀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4월 6일(음 2월 24일) 골롬바는 때가 왔음을 알고 얼른 주 신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포도청에 잡혀 온 그녀는 곧바로 문초와 고문을 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나졸들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골롬바 집의 종을 불러들여 매질하고 다그쳤고, 그만 주 신부의 근황을 발설했으나 어디로 피신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녀를 다시 끌고 와 추달하자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 다녀가신 적은 있으나 모른다.” 이 말에 분노한 나졸들이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에 기가 꺾인 박해자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하였다.

  

압록강에서 돌아선 조선의 쿼바디스

사랑하는 교우들이 잡혀가 나 때문에 고문을 받고 순교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주 신부는 괴로웠다. ‘그들이 찾는 것은 바로 나다. 나 하나 없어지면 해결될 것이 아닌가?’ 결국 주 신부는 조선 사목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갔다. 압록강만 무사히 건너면 그만이었다. 주 신부는 조선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동안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양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 가는데 목자인 내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강을 건너려 하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가자!’ 이런 결의로 그 밤에 발길을 돌린 주문모 신부는 3월 12일(양 4월 24일) 의금부를 찾아가 자수했다. “제가 국경을 넘어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을 사랑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은 십계명에 금하고 있습니다.” 박해자들은 원하던 대답을 듣지 못하자 5월 31일(음 4월 19일) 군문효수 형을 내리고 새남터 형장으로 끌고 갔다. 판결문이 끝나자 주문모 신부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머리를 숙여 휘광이의 칼을 받으니 당시 49세였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골롬바는 대단히 애통해했다. 6년 동안 주 신부를 성심껏 보필해 온 그녀로서는 누구보다 아픔이 컸지만 어렵게 모셔온 사제를 잃어 다시 목자 없는 양이 된 한국교회를 더 걱정했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에 ‘한국교회를 위해 노력한 교우 중에 남녀를 통틀어 강완숙(골롬바)을 당할 사람이 없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그녀는 7월 2일(음 5월 22일) 41세로 서소문 밖에서 동료 9명과 함께 순교했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강완숙(골롬바), 홍필주(필립보) 등 124위가 시복되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가끔 있다. 두 가지를 다 잡을 수 없으니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순간의 선택을 잘하면 득이 되고, 반대로 선택을 잘못하면 해가 되어 후회하거나 고통을 당할 때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홍필주는 선택을 참 잘했다. 그는 계모의 열심한 덕행을 본받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따라나선 길이 바로 ‘생명의 길’이었고, 귀하고 만나기 힘든 주문모 신부를 한 집에서 모시는 영광을 얻어 복사로, 육회의 책임자로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다. 그렇다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립보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려는 찰나 골롬바가 이 광경을 본 것이다. “너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머리 위에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하느냐?” 위기의 순간에 골롬바의 당찬 권면에 다시 힘을 얻어 순교의 길을 갔으니 필립보는 복 받은 사람이다. 아들과 함께 며느리를 믿고 따라온 시어머니의 행적은 아쉽게도 알려진 것이 없으나 평소 열성적인 신심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리라 짐작하고 또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존재였고, 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상대가 나와의 만남을 기뻐하며 기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는지, 아니면 오히려 상대가 나와의 만남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못된 언행이 있었다면 성찰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순교자 성월이 되었으면 한다.

 

* 어농성지 :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