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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문화와 영성 (24)
되찾은 아들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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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송창현(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구원의 위대한 이야기는 탁월한 화가를 만나 어떻게 읽혀지고 표현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렘브란트의 해석

- 그림의 왼쪽에는 한 늙은이가 남루한 행색의 청년을 품에 안고 있는데 그곳으로 빛이 비친다.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감싸 안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 오른쪽의 큰 아들은 어둠 속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이 빛과 어둠의 대조는 그림 안에서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 우리는 먼저 렘브란트가 탁월하게 묘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감상해보자. 루카 15,20은 아버지가 되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아직도 그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절절한 기다림을 표현한다. 그림의 아버지는 흰 수염의 노인으로 묘사된다. 아버지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는 듯이 보인다. 날마다 작은 아들이 되돌아올 길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은 그 기다림과 눈물로 멀어버린 듯하다. 마치 시력을 잃을 만큼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작은 아들을 기다린 것이다.

- 되돌아온 작은 아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다. 그의 신발은 낡았다. 신발이 벗겨진 그의 상처투성이 왼발은 그림의 관객에게 보인다. 이러한 작은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떠났던 그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머리는 빡빡 깎여 있다. 이 모습은 죄인의 상태를 의미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머리는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그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위치는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어머니의 자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자비(慈悲)란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에 대해 느끼는 마음인 것이다. 렘브란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바로 작은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양손이다. 이 부분에 빛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아버지의 왼손은 강한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다. 작은 아들의 어깨를 감싸는 왼손의 펼쳐진 손가락들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변함없는 마음을 표현한다면, 손가락이 모여진 매끈한 오른손은 따뜻한 사랑과 위로를 의미한다. 이 두 손에서 렘브란트는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과 모성을 함께 표현하고자 했다.

- 그림 오른쪽에 있는 큰 아들은 긴 지팡이를 짚고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품에 안으며 몸을 굽히고 있지만, 큰 아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수염이 있고,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큰 아들의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과 몹시 닮았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만남과는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있다.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모습이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기쁨을 표현한다면, 큰 아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방관자의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의미

- 역사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가르쳤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실천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 안에서 현존하는 하나의 사회적 실재이다. 즉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 운동이었다. 루카 15장의 세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비유(루카 15,3-7)에서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한 마리를 잃은 후, 그 잃은 양을 찾고는 기뻐한다. 두 번째 비유(루카 15,8-10)에서는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은 부인이 그것을 찾고서 기뻐한다. 세 번째 비유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와 같이 이 세 비유는 백 중 하나에서 열 중 하나로 그리고 둘 중 하나로 잃어버린 것의 중요성이 점차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각각의 경우, 양 백 마리, 은전 열 닢 그리고 두 아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온전한 형태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양 한 마리, 은전 한 닢, 한 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공동체의 와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회복, 즉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가리킨다. 이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주제는 세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기쁨이라는 모티프와 관계된다.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루카 15장 세 비유의 주제는 그 배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 공동체를 옹호하기 위하여 이 세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 비유의 아버지는 용서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하고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신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킨다면, 큰 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지시할 것이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고 돌아와서도 아들이 아닌 종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단절된 관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종처럼 느끼고 있었다. 이 또한 단절된 관계이다. 사실은 작은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도 잃어버린 아들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도 아들로 받아들이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다. 아버지와 두 아들뿐 아니라 형제간의 공동체도 재형성한다. 작은 아들처럼 큰 아들도 여러 경계들을 설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들 경계들을 허물어 버린다. 경계를 뛰어넘는 자비, 즉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의 실천이 바로 우리 비유의 핵심 메시지이다. 공동체의 회복은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수직적 경계를 허물고, 아들 형제 사이의 수평적 경계를 무효화한다.

-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실천하셨다.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바로 “함께 아파하기”의 에토스이다. 그분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이 모티프가 잘 드러난다. 특히 비유의 등장인물 중에서 아버지가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라는 구절에서 이 주제가 잘 표현된다. 아버지의 “함께 아파하기”는 자신과 작은 아들, 그리고 자신과 큰 아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시킬 뿐 아니라 두 아들 사이의 형제 관계도 화해시킨다. 따라서 우리 비유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새로운 에토스는 “함께 아파하기”를 통한 올바른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의 형성인 것이다.

 

● “성경, 문화와 영성”은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오랜 기간 글을 써주신 송창현 신부님과 애독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