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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歲寒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실장

추운 겨울입니다. 날씨가 이렇게 매섭게 추울 때는 가끔 추사 김정희 선생의 그림 ‘세한도(歲寒圖)’가 생각납니다. 그림을 보면 황량한 겨울 들판에 집이 한 채 있고, 그 주위에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가 서 있을 뿐입니다. 집 주변으로 멋진 산수가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가 수려한 자태를 뽐내지도 않습니다. 유명하다는 ‘세한도’를 처음 보고는 실망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매서운 추위가 찾아들면 ‘세한도’의 춥고 황량한 배경과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세한(歲寒)’이라는 말은 『논어(論語)』에서 왔습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1)

 

조선 금석학의 대가요 서화와 학문에도 뛰어나 청나라까지 유명했던 김정희는 정치적인 이유로 50대 중반에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십 년 전에는 아버지도 유배를 갔고, 유배 중에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부인과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대파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한양에 있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점차 끊겼습니다. 유배 간 죄인과 연루되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김정희는 책을 벗 삼아 지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였던 이상적만은 한결같이 김정희를 챙겼습니다. 청나라에서 귀한 책을 구하여 김정희에게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유배 전이든 유배를 간 후든 이상적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김정희가 보낸 것이 ‘세한도’였습니다. 아마 논어의 이 구절이 생각났겠지요.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런 이치를 절실히 느낄 때가 있지요. 내가 힘들 때 곁에 남아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넉넉한 형편에서는 다들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내가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혀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조차 나의 편이 되어 주고 내 곁에 머물러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그런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직접 위로의 말을 듣고 품에 안기고픈 친구를 필요로 합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얼마나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한 단풍과 큰 그늘을 드리워 주던 나무도 모두 추위가 오면 잎을 떨어뜨리고 추위를 견뎌 내기 위해 죽은 듯이 있습니다. 눈 덮인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강건한 모습은 보는 이에게 믿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처연하고 애틋한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루카 21,12.17)

 

우리의 신앙에 찬바람이 불고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면 우리는 어떨까요? 그제야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의연한 신앙이 드러나겠지요? 평온한 상태에서는 사람들의 신앙이 다 안정되어 보이고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시련을 만나거나 절망에 빠져 허우적댈 때,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박해를 받을 때면 참된 신앙이 빛을 발하겠지요. 약한 신앙은 찬바람에 사그라지겠지요.

 

우리의 신앙이 세한(歲寒)에도 굴하지 않고 푸르름을 유지하는 소나무나 잣나무 같기를 바랍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 몹시 춥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빛”이 되어 줍시다.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1) 『논어』 「자한(子罕)」 27.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