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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先憂後樂(선우후락)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얼마 전 선종하신 제 할머니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1920년에 태어나신 할머니는 98년의 삶을 살고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늘 온화한 미소가 떠오릅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홀로 아파트에 사셨던 할머니께서는 명절이나 생신 때 자녀들과 손주들이 오면 참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일곱 남매와 사위, 며느리에 손주들까지, 좁은 아파트 거실 가득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 할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조용히 뒤에 앉아 흐뭇하게 구경하고 계셨습니다. 피곤하지 않으시냐고 여쭤보면 당신은 괜찮다고 하셨지요. 돌아갈 때가 되면 누구보다 서운해 하시며 오랫동안 배웅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장례를 치르며 누군가가, ‘할머니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기억에도 할머니께서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를 치시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말년에 요양병원에 계실 때, 늘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다 멀리 있는 아들이 안부 전화라도 걸어오면 걱정할까 싶어, ‘난 잘 지낸다. 아무 일 없이 편안하다.’시며 아들이 걱정할까 걱정하셨습니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이 아닌가 합니다.

중국 북송(北宋)시대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범중엄(范仲淹)은 동정호(洞庭湖)를 굽어보는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유명한 ‘악양루기’를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어진 선비의 마음을 잘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천하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에 뒤미처 즐거워한다.”1)

여기서 ‘선우후락(先憂後樂)’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선비나 정치가의 기개보다 ‘어머니의 마음’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세상 모든 근심에 앞서서 먼저 근심하고, 세상 모든 이의 즐거움을 기다린 후에 자신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겠지요. 마치 어머니가 자식들 생각에 근심이 그칠 날이 없고, 즐거움은 자식, 손주들 즐거움을 보는 낙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삼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월, 성모 성월(聖母聖月)입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을 그려봅니다. 그분은 천하의 모든 이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진정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근심보다 앞서서 근심하시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에 뒤미처 즐거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분이 바로 성모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모 성월을 보내며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다 성모님을 그려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나의 근심보다 타인의 근심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나의 즐거움을 조금 양보해 봅시다. 우리도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그분의 근심이 무엇일지 근심해 보고, 그분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즐거워합시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 19,26-27)

 

1) 범중엄(范仲淹), 악양루기(岳陽樓記).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