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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전동 연필깎이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장난감 가게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 백화점 쇼윈도의 명품 핸드백 앞에서, 또는 자동차 전시장의 슈퍼카 앞에서 넋 놓고 바라보는 사람들. 멋진 물건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흔들어 버립니다. 그런 상품은 손짓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나를 가져~ 그러면 행복은 바로 너의 것이야~.’

 

마음이 끌리는 물건을 떠올릴 때면 부끄러운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오릅니다.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전동 연필깎이를 봤습니다. 당시엔 대부분 칼로 연필을 깎았고, 어쩌다 수동 연필깎이(연필을 꽂고 손잡이를 빙빙 돌리면 깎이는 연필깎이)를 가진 아이를 보기는 했지만 전동 연필깎이는 처음 봤습니다. 전기를 충전해서 연필을 구멍에 집어넣기만 하면 ‘윙~’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깎이는 일제 연필깎이였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던 저는 친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얼른 그 연필깎이를 가방에 집어넣어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도둑질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후로도 친구는 내게 연필깎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친구를 만나지도 못했고 연필깎이도 어디로 가 버렸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 그 순간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남의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몰래 훔친 그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아직도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낍니다. 친구와 연락이 닿지도 않으니 사과할 수도 없고, 이 마음은 평생 가져가야겠지요.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가지고 놀면 원래의 좋은 뜻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서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왕을 물리치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이 어느 날 서방의 먼 나라인 여(旅)나라에서 공물로 큰 개를 한 마리 받았습니다. 무왕이 그 개를 너무 마음에 들어하며 곁에 두고 아끼자, 동생이며 나라의 태보(太保)였던 소공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언했습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뺏겨 희롱하며 놀면 덕을 잃어버리고, 물건에 마음을 뺏겨 버리면 뜻을 잃어버립니다.”1)

 

이 말을 듣고 무왕은 은나라의 멸망을 교훈삼아 그 개는 물론 제후국에서 보내온 공물들을 모조리 신하들에게 나눠 주고 정치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현대의 소비사회에서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이 넘쳐납니다. 그 물건을 건전하게 소비하고 잘 쓴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요. 하지만 과시하기 위해서 무절제한 소비를 하거나, 낮은 자존감을 감추려고 명품으로 치장하며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면 물건에 마음을 뺏겨 버리는 “완물상지”의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無所有)”의 아름다움을 많은 이들에게 전해 주셨지만, 우리는 그 “무소유”마저도 내가 꼭 가져야 할 책으로 여겨 소유해 버립니다. 행복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많이 가질수록 내 마음은 복잡하고 빈곤해집니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본 마음도 잃어버리겠지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지금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것은 무엇인가요?

 

1) 『서경(書經)』 「여오(旅獒)」편. “玩人喪德, 玩物喪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