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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일상의 순교(殉敎)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배우는 일은 날마다 보태고(더하고), 도를 행하는 일은 날마다 덜어 낸다.”1)

 

노자(老子)의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그때까지 저는 자신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지식을 쌓는 데만 신경 쓰며 살아온 것 같았습니다.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나를 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보태고 모으는 일에 열중하지요. 지식만이 아닙니다. 재물을 쌓으려고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위로를 받고 인정을 받으며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내 안을 가득 채우려고 날마다 무언가를 보태고 쌓아 나가지만 아무리 채워도 밑 빠진 독처럼 공허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자는 오히려 덜어 내라고 합니다. 내 안에 가득 찬 것을 덜어 내고 덜어 내어 텅 비우라고 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 촌장이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첫 소절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잔과 같습니다. 잔속을 가득 채우고 싶어 이것저것 담아 보지만 신기하게도 욕심은 끝이 없어 아무리 채워도 충만하지 않고 잔은 더러워지기만 합니다. 오히려 잔을 비울 때 그 빈 잔을 가득 채우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 평온, 기쁨…. 바로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이 채워져 있다면 당신께서 들어올 자리는 없겠지요. 나의 욕심과 아집, 이기적인 마음만 가득하다면 하느님께서 들어올 공간도,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텅 빈 충만’이라는 말처럼 역설적으로 우리를 텅 비우는 작업을 통해서 오히려 충만해지는 체험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더위와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덧 9월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기리는 순교자 성월입니다. 그 옛날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믿음, 신념을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은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자신을 자기 것으로 가득 채웠다면 재빨리 배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재산과 명예, 가족,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아쉬워하지 않고 다 비워 냈습니다. 그 빈 곳을 하느님께서 가득 채워 주셨지요. 순교자들은 그동안 맛보지 못한 충만함을 체험했기에 자신을 텅 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움으로써 채워진다.’는 것은 직접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날 목숨을 바쳐 순교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판단이나 생각을 잠시 내려 두고, 마음을 비우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 이런 작업들이 오늘날의 순교가 아닐까요?

최근에 읽었던, 성인이 되신 어느 봉쇄수도원 수사님의 글이 생각납니다.

“불쌍한 영혼아, 많이 괴로워하고 있구나. 평온을 찾느냐? 그 어떤 것 안에서도, 그 어떤 사람 안에서도 너는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잠깐 침묵하여라. 네 영혼 안에서 아주 깊고 조용한 곳을 찾아라. 그리고 그곳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두어라. ……

주님, 당신이 제 마음을 채워 주소서. 오로지 당신 안에서 우리의 갈망은 채워집니다.” 2)

 

1) 『노자(老子)』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2)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성 라파엘의 9일 기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