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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성직자 묘지


글 이찬우 타대오 신부 | 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11월입니다. 11월이면 무릇 가을의 정취도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아름답게 익은 단풍들도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또 생각나는 것이 고(故) 윤임규 신부님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거두어 가십시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나뭇잎 다 떨어져 쇠잔한 팔 위에

거미줄처럼 걸리는 바람과 별빛도

주여, 이젠 거두어 주십시오

그냥 아무것 걸친 것 없는 몸이게

그냥 아무것 들리지 않는 마음이게

 

내게 있는 모든 걸 거두어 주십시오

이제는 당신의 온유한 마음 속에

내 피곤한 눈을 감겠습니다

황량한 비바람의 언덕에서 당신과 격리된 채

풍요로운 시련의 계절도 이제는 끝이 났습니다

 

다만 시간이 안개처럼 부옇게

녹아 있는 감사의 눈물이게

모든 것을 당신 속에 녹이십시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적은 이 시(詩)를 보면 참 신기하고 오묘합니다. 고(故) 윤임규 신부님은 1977년 사제서품을 받고, 1993년 대만에서 공부를 하시고는 1994년 중국에서 선종하셨습니다. 그때 남기신 100편이 넘는 시를 모아 『마음이여 잔잔히 흘러라』라는 유고집을 냈고 위의 시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꼭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 적은 시 ‘가을의 기도’는 11월 위령성월에 어울리는 시(詩)인 것 같습니다.

11월은 위령성월이고, 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에 찾아옵니다. 특히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있는 미사 때는 전대사가 수여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을 찾습니다. 적은 날에는 8백여 명, 많을 때는 1천 5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사에 참례하지만 위령성월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을 찾아 기도하고, 성직자 묘지를 참배합니다. 위령성월에 수여되는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 그럴 겁니다.

 

교구청 안의 성직자 묘지는 1915년 드망즈 주교님이 땅을 매입하면서 조성됩니다. 예전에 ‘있다! 없다?’ 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도심지 안에 있는 공동묘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도심지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성직자 묘지를 조성할 당시에는 교구 내 프랑스 선교사를 위한 묘지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191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에 드망즈 주교님의 주례로 묘지 축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신부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수녀님, 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수녀님들이 함께 성직자 묘지에 묻혔으나, 사제들의 묘지 부족으로 1989년과 1990년에 각각 이장되었습니다.

 성직자 묘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귀입니다. 라틴어인 이 말은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집회서 38장 22절의 말씀, 곧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직자 묘지에 들어서면 중앙에 큰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는 ‘TUNC PAREBIT SIGUNUM FILII HOMINIS IN COELO’라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24장 30절 앞부분의 글귀로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마태오복음 24장은 세상 종말과 구세주의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묘지 중앙 십자가 아래 이 글귀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묻혀 계신 신부님들이 다 소중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을 사셨지만, 특히 신기한 일화를 가지신 신부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묘지 앞부분 두 번째 줄에 묻혀 계신 샤르즈뵈프(한국명 : 송덕망) 신부님이 십니다. ‘송(宋)’이란 글자가 적혀 있고, 오래된 시멘트로 만들어진 묘비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송 신부님은 1920년 4월 22일에 선종하셨습니다. 그때가 피정기간이었는데 『경향잡지』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송 신부가 피정신공을 시작하기 전에 일반 신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불을 놓으러 왔으니 불타는 것 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리오.’ … 우리가 피정을 행함은 우리 열심의 불이 유혹하였을까 하여 이 불을 다시 치성케 하기로 피정을 시작할 터이니 너희는 그동안에 피정하시는 신부들을 위하여 기구하고 또한 너희도 열심히 공부를 마친 후 신부의 성직을 받거든 다른 사람의 열심까지 치성케 하라. 불이 없으면 열을 받지 못하니라. 내가 피정할 동안 너를 돌아보지 못하고 미사 때 외에는 너희를 보지 못하겠다.

송 신부가 며칠 전부터 머리가 조금 아프고 뒷덜미가 조금 거북하시나 다른 신부와 같이 피정을 행하시며 또 이날 아침에도 전과 같이 미사를 시작하여 거양성체 후 천주경을 염하시기 전에 이르러 별안간 우편 뒤에로 졸도하여 머리는 발판층대 밑에로 향하고 두 팔은 양편에로 흩어지는지라 참예하던 신부와 신학생들이 대경황겁하여 달려가….」(『경향잡지』 1920년 5월호 445호 참조)

 

샤르즈뵈프 신부님은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장신부로 재직했습니다. 수많은 신학생들의 모습도 보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때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타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가라는 위임을 받고도 거절하면서까지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남아 있었습니다. 신학생들과 신학교를 사랑했기에 그들이 사제가 될 때까지 신학교에 남아 있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1920년 사제들의 연중피정이 신학교에서 있었습니다. 늘 신학생들과 함께하길 바랐던 샤르즈뵈프 신부님은 연중 사제피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새벽에 미사를 하다가 선종하셨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그분의 뜻, 곧 신학생들과 늘 함께 있고 싶어한 그 뜻을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샤르즈뵈프 신부님 옆에는 이경만 신부님이 누워 계십니다.

이경만 신부님에 대해 『경향잡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경만 요한 신부는 연례에 의하야 금년 피정신공에 참여하려 대구로 향하여 오시다가 김천성당에서 뜻밖에 잔약한 몸에 병이 침중하야 최후성사를 영하시고, 5월 1일 오전 8시 반에 그 영혼을 천주께 바쳤도다.… 요한 이 신부는 평생에 애경하던 송덕망 신부 옆에 편안히 누워 스승과 제자가 함께 대성당과 신품학원을 바라보며 세말종국의 부활 기약을 고대하는도다. 망자 편안함에 쉬어지이다. 아멘.… 기이하도다. 천주의 안배여, 망자가 항상 피정 중에 상사하신 송덕망 신부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그와 같이 선종하기를 원하였으며 이번에 목포 주 신부와 동행하면서 그와 같은 특은 받기가 원이로라 하더니 천주가 그 원의를 채워 주시어 망자 신부에게는 행복을 주시고 피정하는 동접 신부들에게는 큰 교훈과 감동지심을 주셨도다.…」(『경향잡지』1923년 5월호 517호 참조)

 

이경만 신부님은 192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사제로 서품되고는 전라도 나주에 부임을 했고, 이듬해인 1923년 사제 연례피정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제 연례피정을 함께 가던 주재용 신부님에게 샤르즈뵈프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신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 그리고 연중 사제피정 중에 선종하신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모양입니다. 근대화를 겪으며 신학교 또한 사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학교에도 그 여파가 퍼져 수많은 신학생들이 성소를 잃어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 일을 막은 사람이 샤르즈뵈프 신부님이었습니다. 착한 목자, 선한 선생님으로 신학생들에게 비춰졌고, 그런 샤르즈뵈프 신부님께서 피정 때 선종하신 일은 당시 신학생이었던 이경만

신부님에게는 경이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토록 자신이 원하고 사랑했던 샤르즈뵈프 신부님 옆에 함께하길 바랐고, 기도했던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성직자 묘지에 사제(師弟) 간에 함께 누워 계십니다.

 일곱 번째 줄로 내려오면 김동한 가롤로 신부님이 계십니다. 김 신부님은 밀알회를 만드신 신부님으로 1983년 9월 28일 선종하셨습니다. 고(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친형이기도 합니다. 1919년 김천에서 태어나 1945년 성유스티노신학교 신학과를 마친 뒤 사제의 품에 올랐습니다. 부산 범일동, 상주 함창, 진양 문산, 경산, 화원 등지에서 본당사목을 하고는 6.25한국전쟁 때 군종으로 임명돼 1958년 중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종사목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교육철학 및 교육행정학을 공부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부터 경산본당에 있으면서 본당 관할구역 내의 불우한 청년환자 20여 명이 결핵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음을 알고 돌보면서부터 결핵환자들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결핵에 걸리게 되고, 1969년 11월부터 1972년까지 마산 국립결핵병원에서 결핵과 싸우면서 결핵환자들의 어려움과 신앙의 갈증을 체험하고 결핵환자를 돌보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이후 은인들을 찾아 전국을 누비면서 일본, 미국 등지로 도움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병고도 돌보지 않고 결핵환자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동한 신부님의 뜻에 힘을 보태고자 1977년 5월 한국부인회 및 국제부인회 대구지부 회원 10명이 모여 대구결핵요양원 후원회인 밀알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핵환자들이 완치되어도 이들의 사회복귀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점을 감안, 고령에 음성 환자들을 위한 사랑의 집을 건립하던 중에 선종하셨습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위령의 날, 그리고 위령미사를 바칠 때마다 위령감사송을 합니다. 거기에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위령성월은 우리보다 앞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다 천주님 대전 앞에서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음이기도 하지만 또한 천상 탄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하늘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한 분들처럼, 우리 역시 그러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