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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 루르드문학미술제 문학부문 〈동상〉 신앙수기 ②
어머니, 어머니는 제 어머니가 맞으십니까?


글 이승준 마르첼로|내당성당

 

‘성모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뭉클한 마음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이 든다. 나를 유달리 사랑하셨던 할머니께서는 성모당에서 매일매일 묵주기도를 수없이 바치셨는데 성모당을 떠올릴 때마다 그 모습이 은은한 달빛처럼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위해 세례를 받고 시집 오셨지만 소위 말하는 불임 여성이었다. 결혼 후 5년 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희망을 가지고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약도 먹고 진료도 받았으며, 한의원에 가서 한약도 지어 먹어보고 침도 맞아보는 등 여러 가지 인간적인 노력을 다 해보셨지만 번번이 실패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아이 갖기를 포기하셨고 집안에서는 죄인처럼 기가 죽을 대로 죽어 계셨다. 그때 외할머니께서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용한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어느 유명한 사찰에 가서 절을 하고 공을 들여 보라고 권하였다.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해보려고 마음 먹으셨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께서 “우리 집안에서는 그렇게 해서 얻은 자식은 필요 없다!”고 하시며 매우 화를 내셨다. 그리고 잡신에게 의지할 바에는 차라리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청해보라고 하시면서 성모당과 기도 모임에 어머니를 열심히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하느님께 바치셨던 기도는 “손자를 주시면 당신의 허락으로 낳은 자식이니 잘 키워서 다시 당신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는 서원의 기도였다.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시어 9일 기도가 끝난 후 나를 가지게 되었고 덤으로 믿음직스러운 남동생을 한 명 더 주셨다. 집안 어르신들 표현 그대로 저는 대를 잇고 동생은 지금 예비 신학생이다.

 

효성여학교에서 소학교를 나오신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매일 성모당에 가셨다. 그리고는 평생을 하루같이 방석을 살포시 꺼내시어 성모당 중앙쯤에 공손히 앉으시고는 성모님께 큰절을 올리신 후 할머니께서 정해 놓으신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몇 시간씩 하시고 난 뒤에야 성모당에서 나오셨다. 그렇게 기도하시고도 모자라서 집으로 오시는 길목에 있는 관덕정에 가셔서 또 한참 기도하신 후에야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매우 이성적인 분이셨는데 믿음의 정도도 이성적이셨는지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나는 걱정돼서 비싼 돈 들여가 보약을 지어 먹여 놓으면 지는 맨날 기도하느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돌아다니다 들어와서 아프다고 한다.”며 역정을 내셨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집에 따뜻한 밥과 반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집 앞에서 간단히 칼국수나 자장면을 사 잡수시고는 할아버지께 기도하면서도 밥 잘 먹고 다닌다고 큰소리치셨는데 그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피식 나기도 한다. 그런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도 어릴 적에는 거의 매일 할머니와 함께 성모당에 가서 성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성모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나의 어머니라는 믿음이 마음에 싹터 자라났다. 그러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필!승!해!군!” 2014년 2월, 대한민국 해군 훈련병이었던 나는 20년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 계속되는 폭언과 얼차려와 험악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 정서적으로 피폐해져 갔고 결국에는 사람이 아닌 군인이라는 짐승이 된 느낌마저 받게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 밤낮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입대 후 첫 종교 활동 시간이 다가왔다. 4대째 천주교를 믿으며 수녀님 고모와 신부님이 될 동생을 둔 나로서는 “조리병들이 그러던데 불교에 가면 햄버거를 준다더라.”, “조교님이 그러시던데 기독교에 가면 아이유 닮은 누나가 간식 나눠 준다더라.” 하는 매력적인 유혹들을 뒤로한 채 내가 믿어왔던 하느님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하느님께서도 그런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복사로서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불러 주셨다.

제대 위에서 동기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뭉클해졌다. 성전 앞쪽에 깔끔한 옷을 입고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간부들과 군 가족들의 모습과 마치 패잔병 같이 낡은 재활용 피복을 입고 기가 죽은 상태로 각 잡고 앉아 성전 구석에서 초라하게 미사를 보는 동기들의 모습이 너무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미사를 보는 도중에 말씀과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성가를 부르면서 마음속의 성령을 느끼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동기들이 하나둘씩 감동의 눈물을 삼키며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400명이 넘는 동기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숨죽여 울었던 것이다. ‘제대 위에 있으니 절대 울지 말아야지.’ 하며 감정을 조절하던 나 역시 파견성가로 “오래 전부터 널 위해 준비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이라는 가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꾹 참았던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 눈물이 메말라 버린 내 마음을 적시며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희망을 전해 주었다. 그때 내가 체험하고 느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워낙 컸고, 주님의 은총을 강물처럼 받았기에 종교 활동 복귀 후에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과들을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소화했고, 점호 후 취침에 들어서는 같은 격실을 쓰는 동기들에게 다음 주에 같이 성당에 가자며 선교 아닌 선교를 하기까지 했다.

해군 훈련소에서는 2층 침대를 쓴다. 나의 대각선 아래 침대는 부산에서 온 준상이라는 친구가 쓰고 있었는데 준상이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시고 준상이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준상이는 즉각 내 말에 반박했다. “천주교는 이단!”이라는 주장과 함께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참 진리를 찾으라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나도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교관과 조교들이 살벌하게 돌아다니는 훈련소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성경 구절을 화려하게 인용하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준상이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알았다. 니는 교회 열심히 댕기라. 나는 성당 열심히 갈게. 고마 자자. 우리 이카다가 괜히 걸려가 다른 동기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하며 말을 끊고 잠을 청했다. 눈부신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나는 우유처럼 뽀얀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는데 멀리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나를 따사로이 비추어 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빛이 나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나는 방금 전 준상이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했다.

 

- 우리의 신앙은 정말 하느님이 아닌 어머니를 숭배하고 있습니까?

순간 주모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그리고 느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해 주시지만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 빌어주시고 전구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 어머니는 공경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까?

그러자 성모송이 강하게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을 모신 어머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

세에 공경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께 직접 기도드리고 관계를 맺으면 되 지 우리는 왜 중간에 어머니를 끼워 넣어 전구를 청합니까?

질문을 드리자마자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전구에 난색을 표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예수님의 뜻을 꺾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일꾼들에게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셨다. 그 결과 어머니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제자들은 어머니의 전구 덕분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 대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기도에 예수님께는 “포도주가 없구나.” 하시고 나에게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실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들이 어머니께 의지하고 기도를 청한 사례가 없다면서 어머니를 공경하고 어머니께 전구를 청하는 것이 이단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2장의 내용이 울려 퍼지며 예수님 승천 후 아직 성령께서 강림하지 않아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지키며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도들과 제자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께 의지하여 위로자요. 협조자이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던 사도들과 제자들의 감정들도 느껴졌다.

 

- 기도는 살아 있는 사람끼리 해주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던데….

곧 바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는 마태오복음 22장 32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새삼 어머니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 내어 질문 드렸다.

 

- 그럼 어머니, 어머니는 제 어머니가 맞으십니까?

그러자 두 말씀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7)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아와 서로 격려하며,… 예수님께서 나에게 직접 나를 어머니의 아들로,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모자의 연을 맺어 주셨던 것이다. 나는 감격스러워 엎드려 다시 물었다.

 

- 그럼 제가 어머니를 어떻게 모시면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그리고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네! 편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가벼운 예수님의 짐을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땡! 땡! 총 기상 15분 전!”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꿈이었구나!’ 하지만 잠자는 동안 내가 주님께 은혜와 은총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나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 속에, 그리고 성령께서는 당신의 성전인 내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나의 삶은 달라졌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어머니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살고자 노력했고 덕분에 오늘까지도 충만한 기쁨과 행복 속에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 루르드문학미술제 문학부문 당선작품은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