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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응답
부족함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청하며


글 이종욱 안셀모 신부 | 대구가르멜수도원장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생각나는 일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성소 문제로 짧은 고민 후 다니던 대학을 그만 둘 생각으로 수도회 입회허락을 청했던 일, 입회한 후에 가끔 경험하게 된 성소자들과의 편지와 만남과 쉽지 않은 대화들, 그리고 제 삶의 이런저런 기억들!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문제를 생각하면 늘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문제가 한가지 있습니다. 제가 수도회에 소속된 탓이겠습니다만 사제성소보다는 수도성소에 대한 대화가 사실 많았습니다.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것, 기도해달라는 부탁, 이런 주제들이었는데 대부분 성소자들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부족한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을 깨닫고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늘 받곤 했습니다. 저도 체험했던 일이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아마 누구라도 체험하게 되는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받거나 대화를 나누게 되면 저는 무척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그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수도자가 될 자격이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큰 문제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족하고 부정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당장은 고통스럽고 두려울 수밖에 없지만 그 고통의 순간들이 바로 은총의 시간일 게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더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탁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저도 많이 부족하면서 이런 겁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여러 가지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체험한 사람은 우선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부당한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인간적인 면에서 엄청난 고통을 체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외면하려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요나처럼 하느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어부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이 고백은 모든 성소자들이 겪게 되는 경험의 내용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겪게 되는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 나 자신이 정말 너무 부당하다는 마음 아픈 체험은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 이렇게나 부당한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갖추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합당한 모습을 갖춘다는 것, 정말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로만 느껴집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실까요? 그게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첫째는 신앙이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의탁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희망이며, 셋째는 비록 불완전하기 짝이 없지만 하느님께 대한,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일 겁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덕·망덕·애덕의 생활을 해 왔지만 아직도 신덕·망덕·애덕의 생활에 있어서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따르기보다는 거의 개인적인 판단에 매여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면 노력해보기조차 거절해버립니다. 조금 성공하면 우쭐해지고 조금 실패하면 실망하고 좌절하기 일쑤입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는 우리보다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었고, 복음서에 드러난 그의 인간적인 면면을 보면 그렇게 대단히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의 겸손한 신앙은 보잘것 없는 어부를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사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는 직업이었으니까 경험도 많았을 것이고, 자기 나름대로는 상당히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치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겸손하게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겸손은 기적을 낳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존재라 하더라도,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쳐 나가기로 결심한다면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나 인간적인 훌륭함이나 어떤 비범한 위대함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끝없는 희망,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올바른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모든 성소자들이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도 내 판단 · 내 능력에만 의지하고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자세로 머무른다는 것은 단 한순간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 순간순간 만나게 될 갖가지 어려움 앞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믿음 안에서 힘을 얻고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이종욱 신부님은 1990년 종신서원, 사제서품 후 현재 대구가르멜수도원 원장으로 재속가르멜회 월모임 강의와 가르멜중창단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