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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사목을 하며
교정사목 봉사회 회장단 좌담회(1)


글 김종률 스테파노 신부 | 대구대교구 교정사목담당

 

일 시 : 2019년 7월 2일(화) 10:00 ~ 12:30

장 소 : 천주교대구대교구청 대건관 가정복음화국 회의실

주 관 : 천주교대구대교구 사회사목국 교정사목

사 회 : 교정사목 담당 김종률(스테파노) 신부

참석자 : 교정사목 담당 장명훈(론지노) 신부, 교정사목 담당 강 에스텔 수녀, 강경중(루치아노) 대구구치소 봉사회장, 안도범(요아킴) 김천소년교도소 봉사회장, 김선희(요안나) 경주교도소 봉사회장, 최옥이(데레사) 포항교도소 봉사회장, 박영자(벨라뎃다) 대구교도소 봉사회장.

 

사회자 : 지난 7월부터 6개월 동안 『빛』잡지에 교정사목에 대한 글을 연재합니다. 내용 중에 각 봉사회의 대표이신 회장님들의 경험과 의견을 듣고 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이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교정사목 봉사를 하게 된 계기와 첫 느낌은 어떠했습니까?

 

장명훈 신부 : 교구 인사발령에 따라 교정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잘 온 것 같습니다.

 

에스텔 수녀 : 군종사목에서 소임을 하던 저는 처음 왔는데 군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어색하거나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강경중 : 제가 교정사목 봉사를 하게 된 동기는 대구 겨자 씨 성경학교를 담당하셨던 최 골롬바 수녀님(편집자 註 : 2018년까지 교정사목에서 소임하셨음.)께서 “퇴직하면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하고 물으시기에 “어디 가서 봉사나 해야죠.” 라고 했더니 “그럼 구치소에서 봉사를 하면 좋겠어요.” 라고 권유하셔서 이곳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구구치소에 처음 갔을 때 우리가 사는 삶이 거의 다 비슷한데 수형자들과 우리 사이에 공감대가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똑같이 살아가는 데도 자유롭게 사는 우리와 그렇지 않은 그들과 차이점이 있고, 그들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안도범 : 1995년에 세례를 받은 저는 수녀님의 권유로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시 김천소년교도소를 담당하고 계시던 지좌성당 주임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자매님들과 함께 교도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김천소년교도소에는 1200여 명의 소년수가 있었는데 그 중 약 300여 명이 천주교 종교행사에 참석했고, 인원이 많아서 대강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교도소’라는 곳도 잘 몰랐던 저는 꾸르실료교육을 받은 후 큰 감동을 받고 ‘교회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교정사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그때부터 교정사목 봉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김선희 : 경주 근화여고를 다닌 저는 학창시절에 대축일이면 학교 수녀님들과 함께 교도소에 방문해서 성가를 불렀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낯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성인이 되면서 잊고 살았는데 세월이 흘러 40대 초반 즈음에 경주교도소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하시던 자매님이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낯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도망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근화여고에 계시면서 은퇴를 앞둔 할머니 수녀님께서 교도소에서 예비신자교리를 하고 있는데 차량봉사가 필요하다면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차량봉사뿐만 아니라 수녀님께서 맡기신 간식준비나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오전에 예비신자교리와 레지오를 하고 교도소 직원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조금 쉬다가 오후에 미사를 하는 일정이었기에 하루 종일 교도소에 있는 것이 정말 불편했습니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이라 첫 느낌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수님, 힘을 주시면 제가 환갑 때까지 봉사하겠습니다.’ 하고 약속했는데 어느새 환갑이 다 되었습니다. 제게 교도소 봉사를 권유하셨던 이태순(요셉피나) 자매님께서 30년 정도 봉사하셨고, 제가 맡아서 한 지도 어느새 15년 정도 되었습니다. 요셉피나 자매님께서는 약 4년 전에 쓰러지셔서 지금은 봉사를 못하고 계십니다.

 

최옥이 : 2006년에 포항교도소가 개청하면서 교도소 담당 직원이 경주교도소에서부터 열심히 활동하던 김영애(벨라뎃다) 자매에게 포항교도소에도 천주교 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연락해왔습니다. 당시 저는 본당 사회복지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벨라뎃다 자매가 저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을 모았습니다. 재소자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주교대리 신부님께 지도신부님을 청해서 미사를 봉헌하고 매달 봉사자 회의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교정 사목 봉사는 처음이었지만 보람됐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보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니 매순간 기쁘게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몸이 잘 따라주지 않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교정사목 봉사만은 ‘제 몫’이라 다짐하고 있습니다.

 

박영자 : 참 오래됐습니다. 제가 대구교도소에 처음 갔던 날(편집자 註 : 1986년 즈음)에는 아직 성당이 없어서 대강당에서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별 생각 없이 일행 중 제일 앞에 서서 강당 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머리를 빡빡 깎은 채 그 큰 성당에 한가득 앉아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봤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무서웠던 그날이 제가 처음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본 날입니다. 그렇게 강렬했던 첫 기억을 간직한 제게 교정사목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같이 봉사하던 류 말가리다 자매님이 카리타스 나눔회 형제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이 힘들게 번 돈으로 당시 최상품의 비싼 딸기를 준비한 것을 본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자식만 자식이냐? 소외된 그들도 네 자식이니 그들을 돌보아라.’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형제들에게 관심도 이해도 사랑도 없이 그냥 무섭고 두렵기만 했는데 그날 이후로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예수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오늘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교도소에 갑니다. 그 사랑이 형제들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니 이제 무서움과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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