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2020년 ‘치유의 해’
진짜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


글 이영승 아우구스티노 신부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원목 담당

 

“찰칵! 찰칵!”

요즘 들어 식사 전에 할 일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식사 전 기도 후에는 의례히(?) 스마트폰을 꺼내어 음식 사진을 찍는 일입니다. 찍어둔 사진을 다시 보는 일도 없으면서 맛있게 보이는 음식 사진을 찍는 게 재미있어졌다고 할까요? 그렇게 열중해서 냉면을 찍는 제 모습을 보면서 동기 신부님이 일침을 날립니다. “그게 다 늙어서 그런 거야. 너도 이제 아저씨가 돼서 그런 거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이 듣기 싫었을 텐데, 그날은 뭔가 그 말에 엄청 수긍이 갔습니다. ‘아! 나도 늙었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봅니다. 싱싱함이 사라지고 생기를 잃어가고 없던 주름이 생기고 검디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것. 과연 이런 것만이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사람의 특징일까요? 신체적으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정도로 말이죠.

얼마 전 보스턴에서 생활하는 친구가 휴가차 귀국을 했습니다. 서로 시간을 내어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비도 엄청 내리고 행동의 제약도 심해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전에는 거친 말도 주고 받으며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날은 뭔가 날씨 탓인지 주고 받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평소보다 진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는 친구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함께 서점에 갔습니다. 미리 봐두었던 책 한 권을 서가에서 꺼내어 그 친구에게 건넸을 때 친구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 나 이런 말 너무 좋아해. 진짜 지금 나한테 필요한 말들뿐이네”

그 책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문장으로, 필요한 위로를 주는 글들이 담긴 책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문장만 소개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묵묵히 많은 일들을 해결해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에서, 글배우(저자), 강한별(출판, 2019)

 

그렇게 어려운 단어 하나 없고, 과장되게 꾸며진 단어도 아닌,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어 보이는 이 문장이 왜 갑작스레 나에게 필요한 말이 되었을까? 왜 내 마음에 콕 와 닿아서 나를 울컥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늙어서,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문장을 이제는 당연하게, 더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늙고 나이 든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외모에서 생기를 앗아갈지언정, 우리 마음과 영혼은 그전과는 다르게 더욱 성숙해져 간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평범한 한마디에도 갑자기 울컥해지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감수성이 예민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서 그런 것이지요. 게다가 점점 더 우리가 서로에게 당연하고 쉬운 말들을 하는 방법을 잊어 버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런 말들이 진짜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들인데 말이지요.

병원에 계신 많은 분들이 자주 저를 찾으십니다. 당연하게도 환자 분들이 제일 많이 찾으시지만, 보호자나 간병인분들, 그리고 직원 분들도 종종 저에게 이런저런 대화의 기회를 청하기도 합니다. 제가 특별하게 해드리는 것은 없지만 최근에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어쩌면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말들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고했어요.”, “잘하고 있어요.” “덕분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오늘도 서로 인사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 등등 어려운 말보다도 쉽고 간결하지만 상대에게 필요한 말들입니다.

“아! 나 이런 말 너무 좋아해. 진짜 지금 나한테 필요한 말들뿐이네!” 책 한 권을 선물 받고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말들이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어쩌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모로 힘겨운 시기를 함께 살아가는 요즘, 우리 모두에게 진짜 (지금 나한테) 필요한 말들 해보면 어떨까요?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혼자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말해주세요.(반드시 소리 내어 말해주세요!)

 

오늘도 수고했어.

너니까 할 수 있었어.

내일은 더 잘할 거야.

그러니 오늘은 두 다리 쭉 뻗고 자자.

 

한 번 해보셨나요? 이런 낯 뜨거운 말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잘 늙어가고 잘 나이 먹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너무 부끄러워 하지 말고 나 자신을 더 칭찬하고 응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도 못 챙긴다면,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더더욱 안 생길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