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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


글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아프다.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의 형태도 조금씩 다르지만 사람마다 아픔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아플 때 사람들에게 위로를 구하는 사람이 있고, 아플 때 오히려 혼자 조용히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 있다. 위로를 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주변 사람들의 위로를 번잡스레 느껴 조용히 숨어드는 사람이 있다. 아플 때 목놓아 우는 사람이 있고, 조용히 입을 닫는 사람이 있다.

 

조용히 입을 닫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견딜만해서 입을 닫는 것이 아니다. 침묵할 때 오히려 고통을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입을 닫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방식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왜 목놓아 우냐고 나무라서도 안 되고, 왜 가만히 있냐고,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종용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고유한 방식으로 고통을 대하며, 그 고유한 방식이 아니고서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이해하는 것은 사실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다. 나는 타인이 겪는 상황을 나에게 대입한 후, 일종의 추체험으로 내 안에 특정한 감정을 불러내고, 그 감정을 타인이 겪을 법한 감정과 겹쳐보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번져오는 아픔을 관찰하며 타인도 나와 같은 아픔일 거라 추측할 뿐이다.

나는 결국 나의 고통을 읽고, 나의 고통만을 이해할 뿐이다. 타인의 고통에 겹쳐보는 나의 고통에는 고통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녹아있다. 고통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타인의 방식과 같지 않다면 내가 이해했다고 믿는 타인의 고통도 실상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나의 시도는 내 생각의 언저리만을 맴돈다.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 발견되지 않은 땅, 가닿지 못한 미답지로 남는다. 사람 사이 건널 수 없는 간극은 모든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조금씩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탓이 아니다. 하지만 실패하고도 실패한 줄을 모르고 남의 고통을 안다고 함부로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탓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을 『애도일기』*라는 책에 담는다. 애도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 느슨해지고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나의 슬픔은 그렇게 즉시 정화되지 않는다. 나의 슬픔은, 그와는 반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 내가 이렇게 말하면 AC는 대답한다. :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고(그러면서 그는 앎의 주체, 수렴의 주체가 된다.)

- 나는 그 주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아서다.”(81)

 

롤랑 바르트는 자신이 겪는 슬픔을 지인에게 털어놓는다. 내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작아지지 않는다고,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지인은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고 대답한다. 언뜻 듣기에는 공감과 위로의 말처럼 들리는 이 말을 듣고, 롤랑 바르트는 오히려 더 슬퍼한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슬픔이 ‘일반화’된다고 느낀다.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는 대답은 사람이 겪는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해도, 결국은 모두가 겪는 수많은 슬픔 중 하나일 뿐이라는 말이다.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원래 그런 감정’이란 말이다. ‘슬픔은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을 듣고 롤랑 바르트는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다.”고 탄식한다.

슬픔은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어서 ‘원래 그런 거’라는 말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172)이 있다.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 자신만이 아는 고유한 슬픔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자신의 슬픔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말로 표현된 슬픔은 곧 일반적인 의미로 희석되어 버린다. 슬픔이라는 말을 이해했다고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슬픔과는 다른, 그만의 슬픔이 슬픔이라는 단어 뒤에는 숨어 있다.

타인도 나처럼 아프겠지만 나와 같은 방식으로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타인도 나름의 방식으로 아픔을 이겨내겠지만 그의 방식이 나의 방식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정작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한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섬세하게 봐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원래 그런 슬픔’은 없는 거니까.

 

 

* 『애도일기』, 롤랑 바르트, 김진영 역, 걷는나무(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