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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 일기
문장이 말하고 싶은 것들과 말하지 않는 것들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김훈의 『칼의 노래』는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충무공이 백의종군 시절부터 전사할 때까지를 다루고 있지요. 김훈은 특유의 간결하고 강력한 글투로 저

넓은 바다를 홀로 지켜야 했던 한 장수의 고뇌를 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은 ‘섬’과 ‘꽃’이라는 낱말을 축으로 삼아 문장을 엮어냅니다. 그런데 ‘섬’과 ‘꽃’이라는 예쁜 낱말이 만나 지어낸 문장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하고 구슬픕니다. 생각해보면 이 문장을 『칼의 노래』의 첫 문장답게 만드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이 문장의 처연함은 ‘버려진’으로 시작되어 ‘피었다’로 드러납니다.

아마도 왜적이 해친 백성의 몸이 파도에 휩쓸리며 바다를 피로 물들이는 동안 산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섬을 버렸겠지요. 그래서 장수는 흩어져버린 백성을 외로이 지키면서 ‘빈 섬’이 아니라 ‘버려진 섬’을 보고 있습니다. ‘비었다’는 말보다 ‘버려졌다’는 말이 더 정확하고, 정확하기 때문에 문장은 더욱 쓸쓸해집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꽃은 무심히도 피어납니다. ‘버려진’ 이라는 단어는 어둡습니다. 죽음을 닮은 말입니다. 그러나 ‘피었다’는 말은 밝습니다. 삶과 이어지는 말이지요. 처연함을 자아내는 두 말마디는 한 문장 안에서 서로를 멀리하며 대조를 이룹니다. ‘버려진’과 ‘피었다’는 말마디는 서로를 어긋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긋냄이야말로 이 문장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어쩌면 이 문장은 외로운 장수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려진 것은 섬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임금이 살기 위해 북쪽 땅으로 도망하는 동안 장수는 외로이 남쪽 바다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백의종군이란 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이 가득한 엄혹하고 외로운 상황에서도 장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을 다잡습니다. 김훈이 ‘버려진 섬마다 꽃이 졌다.’고 쓰지 않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고 쓴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장수는 ‘버려진 섬’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피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섬에 꽃이 피었기 때문에 ‘칼의 노래’라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렇듯 저 문장의 처연함은 버려짐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피어남으로 점점 커져갑니다.

 

사실 이 문장의 첫 모습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훈은 문장을 두고 고민합니다.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한 달을 고심한 끝에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서야 겨우 조사 하나를 고칩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가 되었습니다. 후일 김훈은 산문집 『바다의 기별』을 통해 이 결정에 대해 고백합니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 나는 사실 만을 가지런히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런 문장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읽었습니다.” (p.141)

 

문장은 작가가 ‘은’과 ‘이’ 사이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을 고뇌의 시간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입을 열어 고백하고서야 겨우 ‘이’ 뒤에 감추어진 ‘은’의 흔적이 드러날 뿐입니다. 독자의 고민이 버려짐과 피어남에 머무는 사이, 작가의 고민은 ‘꽃은’이냐 ‘꽃이’냐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이 사실. 이 어긋남은 우리의 생각을 문장 바깥으로 내몹니다. 읽는 사람은 문장이 말하려고 하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쓰는 사람은 문장에서 드러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을 감추고야 말지요. 그렇다면 문장은 무엇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넌지시 감추기도 합니다. 어쩌면 드러내려는 것보다 감추려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감추어진 것들이 고백될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겠지요.

 

그렇게 이 문장은 달리 표현되지 않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이 문장을 읽어 내겠지요. 작가도 문장도 생각하지 않은 한 단어 ‘마다’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읽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장의 주인은 쓴 사람이겠지만 그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은 읽는 사람이니까요. 말하자면 읽는 사람마다 문장 뒤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숨겨두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올해 그 문장을 자주 붙들고 지냈습니다. 문장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도 나도 살기 위하여 점점 멀어지는 동안 감당해야 했을 외로움에 대해서. 그렇게 점점 짙어져가는 그림자를 도리 없이 참고 버틸 수밖에 없었을 당신의 모습을. 마스크 너머로 조금씩 가빠지는 들숨과 날숨을. 다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초대해 어루만지다가도 이 문장이 ‘버려진 섬에(도) 꽃이 피었다.’가 아니라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섬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를 저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꽃이 피기 때문에 한 문장에 자리합니다. 저마다 피워낸 꽃이 도리 없이 외따로 있는 섬들을 묶어냅니다. 그렇게 저 문장은 제 모습은 처연할지언정 우리가 저마다 살면서도 결코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담담히 알려줍니다.

 

어쩌면 그렇습니다. 약을 먹으며 골방에 숨고서도 책으로 성벽을 쌓은 제가 마지못해 써낸 글을 저마다의 당신이 읽고 있군요. 제가 글을 쓰며 당신들을 생각하는 동안만큼 당신들 저마다 제 글을 읽으며 저를 생각하는 동안 만큼은 우리는 홀로는 아니었겠지요. 어라, 그렇게 꽃이 피고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