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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이야기입니다. 11대 황제인 원제(元帝) 때의 한나라는 국력은 많이 약해지고 북방의 오랑캐인 흉노족의 세력이 너무 커져 흉노족과 화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흉노족의 족장은 한족의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원제는 자신의 수많은 후궁 중에 한 명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당시 후궁이 너무 많아 화공이 후궁들의 화상을 그려 올리면 그걸 보고 흉노족에 시집보낼 후궁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후궁 중에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미모가 출중하고 지혜로웠다고 합니다. 많은 후궁이 화상에게 뇌물을 주며 자신을 잘 그려 달라고 했는데, 왕소군은 자존심이 강해서인지 뇌물을 한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화상은 왕소군을 아주 추하게 그렸지요. 후궁들의 프로필을 본 황제는 당연히 못생긴 왕소군을 흉노족 족장의 아내로 선정했습니다. 나중에 왕소군의 실물을 본 원제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에 놀랐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화공은 황제를 속인 죄로 처형당했다지요. 어쨌거나 왕소군은 눈물을 흘리며 흉노족이 사는 북방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훗날 당나라의 시인 동방규( )는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에서 그녀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했습니다.

 

“…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네요. …”1)

 

고향을 떠나 춥고 황량한 오랑캐의 땅에서 보내야 했을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봄이면 고향 땅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 추운 겨울이 지나갔음을 알리겠지요. 사람들은 하나둘 밖으로 나와 꽃구경을 하며 자연의 신비로움을 이야기하고, 농사꾼들은 한 해 농사를 시작하려고 들로 나갈 겁니다. 하지만 추운 오랑캐 땅에 봄은 더디 옵니다. 절기는 벌써 입춘을 지나고 춘분이 다 되어 가지만 밖에는 아직도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고, 들판에는 풀도 자라지 않고 꽃이 필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고향 생각이 나겠지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습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이제 밖으로 나와 새싹이 돋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두꺼운 마스크를 낀 채 사람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기도 어려워 마음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따뜻하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원래 농경사회에서는 봄이 새해의 시작이었습니다. 학교의 새 학기도 3월에 시작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春)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봄은 방향으로는 동쪽을 상징하며, 색깔은 청색, 기운은 나무(木)의 기운을 가지고 있고, 사덕(四德) 가운데서는 ‘인(仁)’을 상징합니다.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양(陽)의 기운이 점차 커져서 만물에 생기를 주고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러기에 봄은 어지신(仁)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코로나19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마음마저 닫고 추운 겨울처럼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방역 수칙을 잘 지키고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마음은 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봄 기운을 받아들입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1) 동방규(), 「소군원(昭君怨)」, “…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