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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 일기
깨진 전구 조각과 어느 오후의 기억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는 1994년을 살아가는 여중생 은희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은희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학교, 날라리를 두 명씩 적어내라는 선생님, 친구들의 배신, 자신에게는 무관심하지만 공부 잘하는 오빠를 편애하는 부모님, 오빠의 폭력, 그리고 은희보다 모든 것을 먼저 겪었을 언니의 체념까지. 그때는 누구에게나 그랬기 때문에 아무 일조차 아닌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실은 작고 여린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웠음을 영화는 담담하게 비춥니다.

한편 그 모든 것을 그려내는 영화의 장면들은 줄곧 너무나도 평범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아파트와 거리, 어김없이 사각형으로 가득한 교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교복과 책가방, 심지어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 번쯤 들어왔을 것만 같은 김은희라는 이름마저도 그러하지요. 그렇게 익숙한 것들은 은희에게 일어난 일들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걸까요.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은희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화난 목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이윽고 은희가 바라본 거실에는, 아빠가 선 채로 화를 내고 있고 언니는 무릎을 꿇고 울고 있습니다. 엄마가 아빠를 말리고 있고 오빠는 벽 너머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습니다. 아빠는 어젯밤 늦게 들어온 언니를 다그칩니다. 그러다 아빠는 모든 것이 엄마의 자식 교육 탓이라고 쏘아붙입니다. 엄마도 화가 나 아빠의 무관심을 지적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를 밀칩니다. 바닥에 쓰러진 엄마에게 아빠가 손찌검을 하려할 때, 엄마는 협탁에 놓여있던 램프를 집어 아빠를 내려칩니다. 전구 깨지는 소리. 놀란 언니는 울음을 멈추고 오빠는 더 깊이 숨어버립니다. 아빠의 팔에 피가 흐릅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적막을 깹니다. “니네 발 조심해. 방에 들어가!” 언니는 다시 울기 시작하고, 엄마는 구급상자를 꺼내면서 놀란 아빠를 진정시킵니다. 화면은 그 모든 것을 보았을 은희의 얼굴을 다시 비춥니다.

다음날, 은희가 일어나 거실로 나왔을 때,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고 엄마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아 함께 TV를 보고 있습니다. 은희가 식탁에 앉았을 때, TV를 보는 엄마와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은희는 그 모습을 보다말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겨우 한 숟가락을 뜹니다. 아빠의 팔에는 붕대가 감겨있고, 깨진 전구 조각과 빈 램프가 거실 너머 발코니에 놓여 있습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어쩌면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야 김보라 감독을 인터뷰한 기사를 통해서 「벌새」가 김감독의 10대 시절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감독은 영화 시나리오와 몇몇 사람들의 평론을 묶어 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직면했다. (…) 가짜 평화와 거짓을 파헤치고, 숨어 있는 어두움을 부수고 또 부쉈다.”

 

아마도 영화의 장면들은 은희가 나오는 장면과 은희가 나오지 않는 장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은희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은희가 바라보고 있을 광경을 보여주고, 은희를 직접 비추는 장면은 은희가 느낄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보라 감독은 은희의 시선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카메라 너머의 은희를 보면서 작고 여렸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전구가 깨지듯이 산산조각 나버린 일상의 기억을 되살려 어루만지고 다시 빚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일은 아프고 힘든 일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영화 너머의 김보라 감독을 생각하면서,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를 함께 떠올렸습니다. 그의 작품은 사춘기, 첫 번째 잠자리, 결혼, 낙태, 유부남과의 연애, 유방암 투병, 어머니의 알츠하이머 투병과 죽음과 같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요, 그는 자신의 네 번째 소설을 발표하면서 “내가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지요. 그리고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열두 살이던 해, 어느 날 벌어진 사건을 묘사하면서 시작합니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에르노는 어떤 분노를 자제하지 못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낫으로 죽이려고 했던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뒤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고백합니다.

 

“그런 후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부엌에 모였다. 아버지는 창가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싱크대 옆에 서 있었으며, 나는 계단 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정상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연신 손을 떨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낯선 사람처럼 들렸다. 아버지는 ‘넌 왜 울어,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 내가 대꾸했던 한 마디가 기억난다.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 어머니는 ‘자, 이젠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셋 모두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자 아버지는 여느 일요일 저녁과 마찬가지로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에르노는 오랫동안 그날의 일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기에서조차 쓸 수 없었던 이야기를 언어로 표현해보고자 했습니다. 에르노는 기어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열두 살의 자신이 사용한 언어를 발굴하고, 단어를 조립하여 사건을 복원해냅니다. 에르노가 굳이 그 이야기를 말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 충격적이고 엄혹한 기억과 다시 마주했을까요. 그 작업은 고통스럽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에르노는 한 가지만을 고백합니다. 그날의 기억과 연결된 감정은 ‘부끄러움’이었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그날 이후 자신의 존재방식은 ‘부끄러움’이었다고요. 에르노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되는 열두 살의 기억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와 언어규칙을 사용하여 표현해 버린다면, 그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혹은 그 부끄러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김보라가 카메라로 비추는 이야기와 에르노가 말로 빚은 이야기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와 책을 매개로 김보라와 에르노를 마주하며, 그들이 만나면 어떤 대화를 할지 궁금했습니다. 어떤 감정과 함께 각인된 기억 때문에 자신에게도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불편하고, 도리없이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누었을까요.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 그 두려운 기억을 고요히 응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했을까요. 아마도 이 둘이 만날 일은 없으니 그 대화를 상상하는 것은 저나 여러분의 몫이 되겠군요. 아무튼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으며,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참,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에는 벌새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김보라 감독은 주인공 은희를 표현하기에 벌새가 어울렸다고 생각했겠지요.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입니다. 꿀을 먹고 사는 벌새는 꿀을 먹기 위해 그 작은 몸으로 아주 먼 거리를 날아다니지요. 1초에 80번이 넘는 날갯짓으로요.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벌새를 닮아 있을 겁니다. 그저 일상일 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야만 겨우 그 일상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김보라의 「벌새」와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은 벌새의 날갯짓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김보라와 에르노의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이 벌새의 날갯짓을 닮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면 보편적인 감정으로 옮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보라, 『벌새』 (2019)

김보라, 『벌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아르테, 2019.

아니 에르노, 『부끄러움』 이재룡 옮김, 비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