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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온 편지
평신도들의 세계 2
- 연약한 이 여인을 누가?


글 심탁 클레멘스 신부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교구 선교사목

 

1990년대, 쇠퇴해 가는 서양 교회의 모습들을 비판하며 반성하는 동서양의 신학자들의 글을 자주 접했습니다. 당시 그런 유럽 교회 모습이 한국 교회의 미래상이 될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염려는 외형적으로 상당히 현실이 된 듯하고, 지금은 더욱 가속화되는 것 같습니다. 유럽 교회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과 공로 덕분에 빠른 속도로 외적 성장을 한 반면, 복음적 영성적 내실을 잘 다지지 못해 거품이 빠지면서 빨리 쇠락하는 것 은 아닌가 하는 불편한 소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제 코로나19가 전 지구를 뒤덮고 전 세계인을 위협하는 이 순간, 더 이상 유럽과 한국이 별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단, 코로나19에 관련하여 애매하고 과도한 제한을 하는 프랑스 정부를 향하여 주교단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제한 적 종교적 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보다 박력 있는 프랑스 주교단의 복음적 힘을 느낍니다.) 알자스 지방 스트라스부르교구의 본당 사목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의 문제는 대소-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이나 알자스나 서로 간에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다고 여깁니다. 제 나름 진보적으로 느끼는 것은, 크고 무거운 직 책을 갖기보다는 보좌급 협력 사제로 살면서 접한 신자들에게서 신부가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 더욱 선명하게 배운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의 제 눈에는 성인 신자들을 중심으로 볼 때 크게 세 부류로 본당 신자들이 구분됩니다. 첫째 부류 오랜 세월 전통적으로 갈무리해 온 본당 사목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목팀입니다. 한편 신자 수도 줄어들지만 봉사자의 수 역시 줄어들고 신부, 수녀들의 성소는 더욱 줄어 소수 사목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업무량은 날이 갈수록 가중됩니다. 신자들의 필요와 요청은 더욱 다양하고 섬세해지면서 줄지 않으니 신부나 교회 종사자들의 업무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평신도에게 맡겨진 전례업무 등은 거의 독점적 형태로 전문화되어 갑니다. 주임 신부의 임기는 별일이 없는 이상 최하 기본 6년이지만 12년, 18년, 심지어 20년 넘게 한 본당에서 봉직하다가 은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인력이 부족한 사목회에서는 소수의 전문화된 신자들의 활동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자칫 권력화되거나 기득권화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주민 들이나 젊은이들의 참여 욕구가 그들 봉사직의 자리를 위협 하거나 신자들의 요구가 그들의 수년간의 노하우를 능가하여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둘째 부류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입니다.(이들 중 일부는 주일미사에 간헐적으로 참례합니다.) 이들은 본당 활동에 여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어보이는 분들로,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나름대로 지켜나가는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대체로 본당 사목팀에서 제공하는 교육용 도우미 프린트물 등을 제공받습니다. 그 안에도 다양한 신자들의 신앙생활 형태가 존재하지만 대체로 이렇게 단순화시켜 봅니다.

셋째 부류 신자들은 소수의 열성적이고 창의적이며 주 도적인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참여를 원합니다. 소통하기를 원합니다. 본당의 사목 프로그램이 많은 신자들과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관공서의 개신교 예배 안내는 매주 나오는데 가톨릭은 아예 없음을 지적하며, 스스로 프린트물을 만들어 미사 혹은 행사 정보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본당 사목회 차원을 떠나서 스스로 매일미사 참례, 성경 공부, 특정한 신심생활, 특별 수도자적 영성, 병자 방문 및 돌 봄 등의 활동으로 개인 시간표를 가득 채웁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신자들이 일을 낼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기쁨 과 위로를 일상 현장에서 살고 싶어하며 세상에 증거하고 싶어합니다. 초보 선교사의 눈에는 바로 이 세 번째 부류의 신자가 사목회 임원 못지 않는 선교활동의 동업자들로 보입니다. 주로 미사와 고해성사, 면담, 병자성사, 환자-홀몸어르신 방문, 장례 준비와 면담 등에서 신자들의 고통과 아픔, 그들의 목마름과 필요 등을 알게 되고 그분들이 가진 능력과 숨은 탈란트를 감지합니다. 참고로 사목회 임원들 중 평일미사에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본당 사목회는 임원 8~10명 정도 안에서 엘리트주의적 형태로 운영되며, 자체적으로 피드백을 받고 다음 행사를 대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선교사 입장에서 모든 대인 접촉을 넓혀 나가다 보니, 날이 갈수록 본당 신자들이 사목회 운영을 바라보며 많은 실망과 기대 등이 섞여 가슴앓이를 하고 있음을 듣고 보게 됩니다. 선교사로서 현장의 필요와 갈증을 아는 만큼 사목회에 공유를 시도합니다. 일반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사목회 내에서 몰이해나 오해가 있어 비판이 있을 때 목소리를 낼수 없는 신자들의 입장을 변론하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미운 오리’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점차 회의 중에 말수를 줄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려고 시도 하다 보니 ‘사생활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줘도 하느님만 아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것이 선교의 근본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둘 다 성취되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본질적 선택의 기로에 설 땐 분명 후자를 선택해야 하니까요! 지금 알게 된 것, 지금 하는 일을 진작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저의 배움은 이리 더딜까요?

 

연약한 이 여인을 누가?

세 개 본당의 주일미사 성가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A본당과 B본당에서는 높은 성가대석에 5~6명 혹은 7~8명의 성가대원이 미사 성가를 독점하는데 대개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습니다. 반면 오베르네본당에서는 토, 일 주일미사가 세 번 봉헌되는데, 특히 토, 일 저녁미사에는 성가대, 반주자, 선창자도 없는 경우가 많아서 주례 신부 혼자 성가곡도 뽑고 선창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성가곡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제가 창단한 젊은 성가대는 주로 토요일 저녁미사에 봉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총회장 부부가 자주 주일 저녁 미사곡 선창 봉사를 하곤합니다.

마침 최근 발탁된 신참 선창자가 신자들이 부를 성가곡 가사를 프린트할 수 있도록 메일을 저에게 보냈습니다. 입당, 키리에, 화답송, 복음 전 노래, 봉헌, 아남네즈, 하느님의 어린양, 성체성가, 퇴장까지. 다소 엉성해 보여서 나름대로 보충을 하고, 사무장(70대 여성)에게 마지막 요청의 의미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금요일 아침 사무실, 주임 신부와 제의방 자매님과 그 딸이 있는 자리에서 MT 사무장 여사는 제가 보완한 초안 A5 용지를 들고 저에게 다가와서 종이를 좌우로 흔들며 ‘신자 수도 많지 않은데 …. 이것도 소비다. 프린트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순간 ‘이건 뭐지?’라는 의문이 듦과 동시에 본토 알자스 여인에게 경상도 버럭 폭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왜 나한 그런 명령을 하지? 신참 선창자의 봉사를 위해, 미사에 오는 신자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사무실의 역할 아닌가? 난 당신의 기술이 필요해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왜 사목활동을 가로막는 거지?’ 당황하고 놀라며 의자에 앉은 저를 내려다 보던 그녀는 ‘내가 널 도와주려고 했지, 방해하려고 했나?’라고 하며, 옆방 준비실로 커피를 가지러 갑니다. 잠시 후 다시 사무실에 들어서는 얼굴을 보니, 거기서 울었던 것 같았습니다. ‘하, 이걸 어째! 우리 친했는데, 우째 이런 일이….’

친하고 편한 것은 좋은데, 업무상에서 공과 사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오던 것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설움에 북받친 여인을 향해 벌떡 일어나서 ‘MT! 내가 오해를 했다면 미안하다!’ 그녀가 말합니다. ‘앞으로 끌레망한테는 충고같은 거 안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