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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일기
아득했던 여로의 끝에서 저녁노을을 보게 된다면


글 전형천 미카엘신부 I 국내연학

 

어떤 문장을 읽을 때면, 문장을 쓴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쓴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 선하다고 생각되는가 하면, 그 눈길이 생생해지기도 하지요. 그런 문장은 작가와 똑 닮아 있겠지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읽히는 문장은 아마도 쓴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열정이 커서 그런 것도 아닌데 나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꽃 피던 어느 날,큰 어른1)께서 남기신 문장들을 읽었습니다. 여러 문장 가운데 저 문장은 어른을 가장 닮아 있어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고, 볕이 따숩던 학교 담장 아래에 앉아, 이 문장을 따라 읽으며 그분을 추억했습니다. 그분의 말투와 낱말에 대해서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문장에 새긴 어른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는 그 문장을 두고 그분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그 문장을 두고 선생님과 주고받은 대화와 장면은 오래 기억되겠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이렇게 기어이 문장으로 박제해두고야 말겠지요.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밤까지 어른께서 남긴 책들을 읽었습니다. 어른께서는 은퇴 이후 두 권의 수필집을 내셨습니다. 『저녁노을에 햇빛이(2008)』가 그분의 투병기와 인생여정을 담은 회고록에 가깝다면, 두 번째 책 『저녁노을에 햇빛이Ⅱ(2014)』는 묵상집에 가깝습니다. 세권의 시집도 있습니다. 『일기(1990)』는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책을 펴내시던 때까지 연대순으로 시를 엮어두고 있습니다. 『아득한 여로(2009)』에서는 그 이후 쓰신 시를 엮어내셨지 싶습니다. 『오후의 새(2015)』에 는 『일기』와 『아득한 여로』에서 몇 편을 추려내고 이후에 쓰신 시를 덧붙여, 아흔아홉 편의 시를 묶어내셨습니다. 두 권의 수필집과 세 권의 시집은 함께 읽기 좋은 책입니다. 수필 집 어귀에는 시가 떠나온 자리가 있더군요. 사람의 말은 삶의 자리와 엮여있기 마련이니까요.

 

마음을 묶어두고 머물게 하는 문장은 꼭 책을 편 뒤나 책을 덮기 전에 있었습니다. 어른께서는 『저녁노을에 햇빛이』를 펴내시면서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런 말을 친구에게 하듯 사랑으로 속삭이고 싶었습니다.”고 고백하시다가, 『저녁노을에 햇빛이 II』에서는 “나를 기억해주시는 여러분께 모자라는 내 사랑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고 적어두셨지요. 수필집이 어른께서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라면, 시집의 고백은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일기』을 묶어내시면서, 어른께서는 “이 글의 묶음으로 나를 바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이 시집의 제목이 ‘일기’인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쓰기이지만, 남들이 읽을 수 있도록 펴내고 있으니까요. 『아득한 여로』의 머리말에서는 당신이 보신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어 보다가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보이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리곤 여섯 개의 시 묶음 바깥에 “자화상”이란 시를 우두커니 놓아두셨습니다. 그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지요.

 

“나도 분명 한 사람인데/ 이렇게도 갖추지 못한 것이 많다./ 살수록 일그러지는 내 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자화상을 그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나도 한 사람이었음을 그려놓아야 한다.” - “자화상”,『아득한 여로』 중에서

 

“자화상”의 고백은 『오후의 새』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시선집을 엮어내는 어른께서는 책의 말미에 서문을 대신하여 “선물인 나”를 실어두셨습니다.

 

“나는 한 사람이다. 아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쳐다보고 나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 그 사람들이 혹 나를 보고 싶으면 이 글 한 구절을 보고 나를 보듯 하면 어떨까 싶은 마음뿐이다. 나도 한 사람이다.”

“이제 더 줄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가 가까이 찾아가고픈 생각이 나고, 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여기서 나를 보라고 나를 보내는 것이다. … 나는 시를 쓴 것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글은 나다. 이문희…” - “선물인 나”, 『오후의 새』 중에서

 

신학생 시절 어른의 큰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몇 달을 살았습니다. 새벽 어스름에 미사를 한 뒤 밥을 먹고, 달이 기울도록 잔을 받아 마시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 호사였는지 그때는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먹었습니다. 꽃이 필 무렵 멀고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어른께서는 앞산 자락에서 밥을 사주시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간에 여행을 멈추고 돌아왔고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찾아뵙지 못했고, 그 부탁이 너무 무겁고 컸다는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어른께서는 간간히 책을 내실 때 면, 책 속표지에 제 이름 석 자를 적어 보내주셨습니다. 죽을 만큼 몸이 아플 무렵에야 찾아뵈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하루하루 미루었습니다. 이제 뒤늦게 용서를 청하고 싶은 저는 갈 곳을 잃고 문장 몇 개를 붙들고 마음을 기대 놓고 있습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나 “저녁노을에 햇빛이” 잘 드는 방 에 오래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저녁노을에 햇빛이 바로 보이는 방에 앉아서 창 너머로 햇빛을 본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었다.”(『저녁노을의 햇빛이 II』, 151) 진목정 언덕 위를 물들이던, 순교자의 핏빛을 닮은 노을을 바라보셨던 걸까요. 아마도 어른께서는 그 너머를 보고 계셨지 싶습니다. “언젠가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을 바라는 마음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틀림없이 저녁노을의 햇빛 그 너머에 그런 광경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게 되는 것 은 아닌가?”(『저녁노을에 햇빛이 II』, 155) 낮에도 밤에도 앉아계셨을 그 창 너머에,해가 지고 밤이 오면 또 무엇을 바라보셨을지 ….

어른께서는 그 창 너머로 자주 새를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오후의 새』 첫 장에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쓰신 시들이 실렸습니다. “오후의 새”라는 시가 처음에 자리하고도, 이어 “새”라는 제목의 연작시 세편이 더 있습니다. “요즈음 나는 새하고 논다/ 가만히 앉아서 창 너머를 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새 6) 늦어가는 오후 노을이 지기 전 나른한 눈길 너머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보는 어른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봅니다.

 

“… 일어서서 창 너머로/ 새를 찾았다// … // 문을 열면 날아갈 것 같아/ 보고만 있었는데/ 훌쩍/ 새는 날아가버렸다// 날아갔기 때문에/ 따라갈 수 없고" 다시 의자에 돌아온다.”(『오후의 새』) 아득해 보이는 여정이 끝나고, 저녁노을에 햇빛을 보게 된다면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볼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니 장례미사를 마치고 행렬해 나가시는 주교님들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습니다. 문득 돌아다보면 거 기 어른께서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을 두고 같은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오늘도 해가 뜨고 있습니다. 마음에 세운 문장을 다 쓰고 거기에 마침점을 찍으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나 봅니다. 찾아볼 누구도 생각이 나지를 않지만 만나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물 날이 저 에게도 오겠지요. 저는 그때야 어른의 책을 다시 펴겠습니다.

 

『일기』, 1990.

『저녁노을에 햇빛이』,대건인쇄출판사, 2008.

『아득한 여로』,문학세계사, 2009.

『저녁노을에 햇빛이 II 』,대건인쇄출판사, 2014.

『오후의 새』,대건인쇄출판사, 2015.

 

1) 故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님.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