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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골목신앙
우리 어머니는 예언자


글 이재근 레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날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보좌신부 3년차 때,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이스라엘 이집트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비행기를 10시간 이상 타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하루하루 병장이 전역 일을 손꼽아 기다리듯 성지순례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성지순례를 떠나기 하루 전날이 되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그냥 모든 게 다 즐겁고 행복했다. 심지어 부모님의 원수를 만나도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물론 나에게 부모님의 원수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없다!)

저녁이 되어 짐 정리를 시작했다. 12일간의 일정이다 보니 챙겨야 할 것도, 신경써야 할 것도 의외로 많았다. 그렇게 한참 짐을 싸고 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다녀오라는 안부전화였다. 짐 정리가 급했던 나는 알겠다고 대충 대답하고는 끊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바람막이 옷은 챙겼어?”라고 물으셨다. 그때는 8월이었다. 더군다나 이집트 이스라엘의 날씨는 한국보다 훨씬 더웠다. 그래서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혹시 모르니 챙겨라.”고 하셨고, 나는 “내가 어린애인가요.”하며 응답했다. 그렇게 짜증을 잔뜩 낸 후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번에는 “속옷은 많이 챙겼어?”라고 물으셨다. 나는 여행갈 때 짐이 많은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속옷도 하나만 가져가서 매일매일 빨아 입는 편이다. 그런 나의 성격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이번에는 10일이 넘는 긴 일정이니 여분의 속옷을 챙겨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나는 어머니께 짜증이 아닌 화를 내며 “제가 알아서 할게요.”하면서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12일간의 성지순례 동안 나는 두 가지 안 좋은 일을 겪었다. 하나는 속옷을 하나만 가지고 계속 빨아 입다가 셋째 날에 결국 찢어져 버린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벽 1시에 시나이산을 등반하는데 얼어 죽을 뻔했던 것이다. 결국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은 없으셨지만 어머니의 말씀이 모두 옳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는 무조건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나는 그 이후로 두 번의 성지순례를 더 다녀왔지만 단 한번도 어머니 말씀에 짜증내지 않았다.

상대방이 걱정되어서 조언을 해주는데 반응이 짜증으로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만약 나라면 더 이상 조언 따위 해주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조언을 해주지 않을 것 같다. 그 사람이 친한 친구라면 더욱더 배신감이 느껴져서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짜증을 내고 이후에는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까지 나를 걱정하셨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내가 내는 짜증으로 인해 서운해진 마음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셨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예언자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따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어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예언자를 박해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나 같으면 예언자를 당장 그만 둘 것이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냥 저 사람들을 포기하라고 하느님을 설득할 것 같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박해가 심해지면 질수록 더 간절히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호소했다.

이러한 예언자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뿐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까지도 함께 전해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약시대처럼 특정인물이 아닌, 누구나 예언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성지순례 이야기에서 내가 만난 예언자는 바로 우리 어머니다. 조금 번거로울 수 있지만 내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나를 걱정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예수 성심을 표현한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예수님의 심장을 아프게 그려놨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귀찮아하거나 짜증냈던 우리들의 행동이 만든 아픔이다. 그 옛날 내가 어머니께 짜증을 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상처들로 멈추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당신이 받으신 상처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 줄 예언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부모님일 수도 있고 내 자식일 수도 있다. 또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일 수도 있고 나의 친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이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과 함께 행복한 한 달을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