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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일기
하늘을 버렸던 검은 바다, 주저앉은 물고기의 꿈


글 전형천 미카엘신부 | 국내연학

 

하루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잔뜩 날이 선 문장들은 생각을 판단하고 말들을 벌하고 있었습니다. 설득과 토론은 허락되지 않았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어가 사라지고 문장이 찢겨나간 자리는 휑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실없는 웃음과 농담으로 채우려 들었습니다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지은 자는 저였고 단어를 지우고 문장을 흩은 자도 바로 저라는 사실을 마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쓴 것을 버렸고, 버려진 단어와 문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저를 구했습니다. 한동안 제 공부가 하도 알량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거들떠보기도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을 붙잡고 이 공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집을 짓고 길을 닦는 사람과 같이 땀 흘리는 노동자를 만나면 넋을 잃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겨우 돌아와 창가 책상에 자괴감을 주저앉히고 나면, 눈앞에는 검은 바다가 일렁이곤 했습니다. 그 바다 너머에 갇혀 물고기 배를 갈랐던 사람이 말을 붙여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1758~1816)은 섬 앞바다에 깃들어 사는 물고기를 살펴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학 전문서인 『자산어보』입니다. 정약전은 어보에 짧은 서문을 달아두었습니다. 정약전은 흑산에 갇혀 16년을 보냈지만 그 세월의 기록은 많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어보의 서문에 기대어 그의 삶을 더듬어보곤 했습니다. 성리학을 배운 고고한 유자儒者가 주저앉아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어부와 자리하여 스스럼없이 묻고 들었을 테지요. 이 생경한 일을 두고 작가 김훈은 『흑산』을 썼고, 영화감독 이준익은 “자산어보(2021)”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서문은 세월에 비해 지나치게 간략하고 그 행간 역시 흑산과 땅끝 사이처럼 넓으므로, 사람들의 상상은 그의 깊고 넓은 침묵을 감당하지 못하겠지요. 정약전이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었듯이, 다만 그의 문장을 들여다볼 뿐입니다.

 

“자산(玆山)이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으로 유배되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이 컴컴하여 두려우니 가족들이 편지에서 번번이 ‘자산’이라 하였다. ‘자(玆)’ 역시 검다는 말이다.”

- 『자산어보』 서문

 

사람들은 남도 땅끝 너머의 섬을 ‘흑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다가 무척 깊어 검푸른 빛이 돌았고, 멀리서 보면 산과 바다 모두가 검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섬에 갇힌 그는 바다의 검은 빛을 두려워했습니다. 검다는 말조차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검은 빛을 표현하기 위해 검다는 말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한자에 어두운 저는 두 글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검을 흑’에 담긴 컴컴함을 알지 못합니다만, 아무리 글자를 바꾸어 써도 그 검은 빛은 흐려지지 않았겠지요. 검은 것을 검다고 하기 어려워 달리 표현한 말조차 검다는 말이었던 것처럼, 그는 죽을 때까지 검은 섬과 바다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바다의 검은 빛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두려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요.

 

정약전은 신유박해(1801)로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박해에는 정치적 맥락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순조가 어렸으므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순왕후를 받치는 세력은 노론 벽파였는데, 이들은 정조와 일련의 문제로 계속해서 대립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사라지자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힘을 키운 시파들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시파에 속한 남인들이 서학에 심취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약전 안드레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정약용 요한은 체포되었습니다. 약종은 순교하고 약전과 약용은 배교했고 감형되어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삼형제의 순교와 배교에는 기이한 면이 있습니다. 약종은 바로 누워 하늘을 우러러보며 칼을 받았고, 후일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약용은 10년 전 교황청에서 제사를 금할 때 이미 신앙을 버렸고, 정조가 살아있을 때 서학에 빠진 일을 뉘우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신유박해 때에도 약용은 권철신과 황사영을 고발했으며,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고 심문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합니다. 그러나 약전의 배교에 대해서는 배교했다는 사실 외에는 더 언급되지 않습니다. 순교자 정약종과 적극적 배교자 정약용 그 사이 어딘가에 정약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약전과 정약용이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꼈음을 생각하면서 두 사람이 배교한 이유를 짐작합니다. 형과 아우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배교를 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 역시 이러한 상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의 속내를 알 길은 없습니다.

약전은 신지도(완도)로 약용은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습니다. 그해 겨울 조카사위 황사영이 잡혀, 백서 사건이 벌어졌고 두 형제는 더 먼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약전은 흑산으로, 약용은 강진에 갇혔습니다. 강진은 땅끝이기는 하나 섬은 아니었고, 같은 유배형이라도 섬과 물은 달랐습니다. 이는 권력자들이 정약용보다 정약전을 더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약전은 끝끝내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16년째 되던 해 섬에서 죽었습니다. 개혁군주 정조의 품에서 입신하여 날아오르던 정약전은 하늘을 저버리고서도 검은 바다에 갇혔습니다. 바다의 검은 빛에 갇혀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김훈은 약전을 생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 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을 쏘아야 했다.” 김훈은 정약전이 애써 자산이라고 한 것을 기어이 바로잡아 책의 제목을 『흑산』이라고 썼습니다. 그렇게라도 정약전이 마주했던 컴컴하고 막막한 두려움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뒤로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현세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섬에서나 땅끝에서나 삶을 단념할 수는 없었고, 두 형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살며 또 썼습니다. 강진의 정약용은 제자들을 기르며 많은 책을 썼습니다. 지방관리의 의무를 다룬『목민심서』, 중앙 정치의 개혁을 다룬 『경세유표』, 범죄의 판결과 형벌을 다룬 『흠흠신서』를 포함하여 500여 권의 책을 남깁니다. 한편 흑산의 정약전은 사람들과 술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산어보』와 『표해시말』을 썼습니다. 『표해시말』은 한 장사치가 표류하여 필리핀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겪은 일을 쓴 이야기책입니다. 정약용이 정치를 말할 때 정약전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산의 바다 안에는 어족魚族이 매우 번성하여 이름을 아는 자가 드무니 사물에 정통한 자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나는 이에 널리 섬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계보系譜를 만들 생각을 하였는데, 사람마다 각자 말이 달라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섬에 장창대라는 사람이 있어 … 그와 함께 연구하고 차례를 매겨 책을 완성하고는 ‘자산어보’라고 이름 붙였으니 … 이로 인해 후세의 군자들이 이를 보완한다면 이 책이 병을 치료하고 이롭게 활용하여 재화를 다스림에 여러 사람들에게 참으로 응당 밑천이 될 것이며, 또한 이로써 … 알지 못했던 것을 널리 참조하는 데 보탬이 되게끔 하고자 할 뿐이다.”

- 『자산어보』 서문

 

흑산에 도착한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백성이 이렇게 가난한지 몰랐으며 세끼 밥을 먹는 것이 호강인지 몰랐다.” 척박한 바위섬인 흑산도에서 사람들의 생계는 바다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부르는 이름이 저마다 다르고 먹는 법이나 약으로 쓰는 방법이 달라, 사람들은 풍부한 수산자원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정약전은 바다의 풍부한 자원을 연구해 습성과 쓰임을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습니다. 정약전은 12년간의 연구를 통해 155종의 바다생물의 이름과 습성, 먹는 법과 약으로 쓰는 법까지 기록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청어 : 길이는 한자 남짓이다. 몸은 좁고 색은 푸른색이며 물을 떠난 지 오래되면 볼이 붉어진다. 맛은 담백하고 싱거워, 국, 구이, 젓갈, 어포로 먹기에 적합하다. 정월에 포구로 들어와 해안을 따라가며 알을 낳는데, 억만 마리가 떼지어 와 바다를 가릴 정도다. 3월 사이에 산란하고 나면 물러간다. 그후에 길이 3~4치 정도되는 새끼가 그물에 걸린다. … 이 물고기는 동지 이전에 영남좌도에 처음 나와서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가서 3월에 황해도에서 나온다. … 창대가 말하기를 ‘영남에서 나는 것은 척추가 74마디고 호남에서 나는 것은 척추가 53마디다.’라고 하였다.”

-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종류: 청어

 

정약전이 청어를 기술한 이 내용은 학문적으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어종의 서식지에 따라 척추 개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셈입니다. 같은 종이라도 살고 있는 장소에 따라 생김이나 행동, 유전적으로 다를 수 있고, 그런 특징에 따라 비슷한 무리를 구분하는 것을 어종의 ‘계군’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19세기 후반에야 등장하는 이론이니 정약전은 100년이나 앞서서 이를 파악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인상적인 것은 학문적 성과에만 있지 않습니다. 정약전은 굳이 ‘창대가 말하기를’ 하고 덧붙입니다. 어보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정약전은 매번 ‘창대가 말하기를’, 혹은 ‘~라고 창대가 말하였다.’하고 덧붙입니다. 정약전이 굳이 창대를 인용하는 것은, 그가 창대를 대할 때 사대부로서 한낱 어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공동 연구자로, 나아가 한 존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요.

 

혹자들은 흑산의 정약전과 강진의 정약용이 걸어간 다른 길을 ‘자산어보의 길’과 ‘목민심서의 길’이라고도 하던데, 그 길의 차이를 현실 정치에 대한 태도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창대와 사람들을 대하는 정약전의 태도를 생각할 때 두 길의 차이는 더 근본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약용이 조선이라는 수직사회를 되살리기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정약전은 조선이 버린 검은 바다에서 수평사회를 실천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이준익 감독은 제가 보았던 것을 함께 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창대는 약전에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책은 쓰지 않습니까요? 강진 선생님은 … ” 약전은 답합니다. “그것은 나와 내 아우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적자도 서자도 없고 주인도 노비도 없고 임금도 필요없는 그런 세상이다. 그러니 내 어찌 그런 책을 쓸 수 있겠느냐. 사학 죄인도 모자라 남은 처자식도 화를 당할 텐데.” 이준익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서학이든 성리학이든 좋은 것은 다 갖다 써야지. 나는 성리학으로 천주학을 받아들였으나, 이 나라는 나 하나도 못 받아 들였다. 이 나라의 성리학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 이 나라의 주인이 성리학이냐? 백성이냐?” 비슷한 구절을 꼭 어디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율법인지 사람인지 물었던 이가 있었다지요. 역사의 정약전이 정말 노비도 임금도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면, 그 꿈은 그에게서 온 것이었을까요.

약전은 그를 믿었고 그를 저버린 덕분에 검은 바다에서 갇혔습니다. 하늘을 저버리고 겨우 살아남은 이에게 허락된 것은 검은 바다였고, 바다에서 삶을 건져 내면서도 바다의 검은 빛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안드레아라는 이름을 버렸는지 마음속에 간직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안드레아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배움을 따라갔습니다만, 약전은 검은 바다가 만들어 낸 흰 파도가 바위를 휘감고 모래톱을 핥는 해변에 앉아 물고기의 배를 가르며 배웠습니다. 물고기는 도피였을까요. 절망 속에서 간신히 부여잡은 희망이었을까요.

 

며칠 전 문화인류학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개념 하나를 주워 담았습니다. ‘에스노그라피 ethnography(문화기술지, 민속지학 등으로 번역됨)’였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는 것,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벌어진 일과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는 것이 에스노그라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정약전은 에스노그라피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지배하고 무시하고 망각하려고 학문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무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도리없이 저의 공부는 책상 위에서 이루어져 자주 알량하고 한심하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약전의 공부를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 공부가 누구의 생각과 말을 판단하지 않으며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않기를,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검은 바다에 주저앉아 물고기 배를 가르는 그 덕분에 뜨거운 여름을 날 수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입술을 달싹이며 히죽거렸던 어보의 한 구절을, 언젠가는 다시금 배신하고야 말겠지만, 그 구절이 한때 저를 구했음을 잊을 수가 없겠습니다.

 

“주머니가 있어 먹물을 담고 있는데 다른 동물이 습격하면 그 먹물을 뿜어내어 현혹시킨다. 그 먹물을 가져다 글씨를 쓰면 색이 매우 빛나고 윤기가 난다. 다만 오래 두면 벗겨지고 떨어져서 흔적이 없어지는데 바닷물에 담그면 먹물의 흔적이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고 한다.”

- 『자산어보』 비늘이 없는 종류: 오적어

 

정약전, 『자산어보』, 권경순/김광년 옮김, 더스토리, 2021.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이준익 감독, “자산어보”(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