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여는 글
달변(達辯)과 눌변(訥辯)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얼마 전 어느 후원회의 미사가 있었습니다. 강론을 위해서 복음을 묵상하고 강론할 것을 조금 메모해 뒀습니다. 미사 강론 때 그 메모를 보며 강론을 하는데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말을 너무 잘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달변가(達辯家)란 말인가?’ 그러면서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지나서, 동양철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논어』 강독을 하면서 이야기를 펴 나가는데, 그때도 ‘말 참 잘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훌륭한 탈렌트인데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요? 강론 잘하는 사제, 강의 잘하는 교수라는 말은 가장 큰 칭찬일 텐데 말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수차례 강조합니다. 말은 어눌해야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고. 그러니 공자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는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은 따르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논어』에는 이와 관련된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고자 한다.”1)

 

군자가 먹는 데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거처하는 데 편하기를 구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하고, 말은 신중히 하며, 도덕과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서 자신을 바로잡으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2)

 

“군자는 그의 말이 그의 실천보다 넘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3)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 보좌신부로 생활하던 때를 생각 해 보면, 하루하루 강론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미사를 집전한다는 것이 너무 떨리고 긴장되었는데, 거기에 강론까지 준비해야 하니 부담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복음을 읽고 해설집을 뒤적이고 인터넷을 헤매며 강론 때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어떤 날은 준비하느라 밤을 꼬박 새기도 했지요. 그리고 내 삶이 뒷받침되지도 않으면서 강론 때 ‘사랑해라’, ‘용서해라’는 말을 하고 나면 위선자를 질책하시는 예수님의 꾸지람이 들리는 것 같아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나 미사를 집전 하는 일도, 강론을 준비하는 일도,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 일도 익숙해졌습니다. 익숙해졌다는 것은 노련해졌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떤 일을 여러 번 겪어서 적응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가슴 떨리는 설렘이나 긴장도 없어지고, 내가 하는 말의 무게도 느끼지 못한 채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옛 성현들은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요? 『논어』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재여(幸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달변이었지만 행동은 게을렀나 봅니다. 공자는 재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다. 지금 나는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까지도 본다. 재여를 보고서 이렇게 고쳤다.”4)

물론 감동을 주는 강론이나 강의를 듣고 희망을 갖거나 삶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달변가가 되기보다 좀 눌변(酌辯)이라 하더라도 삶이 뒷받침되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바람입니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1) 『논어』, 「이인(里仁)」, 24.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2) 『논어』, 「학이(學而)」, 14.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3) 『논어』, 「헌문(憲問)」, 28. “君子恥其言而過其行.”

4) 『논어』,「공야장(公冶長)」,10.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