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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나 홀로 깨어 있구나.”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동쪽의 제(齊)나라와 서쪽의 진(秦)나라가 강대국으로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나름 부강했던 남쪽의 초(楚)나라도 제나라와 진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서쪽의 진나라가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며 장차 중국 전역을 통일하려는 야욕을 보이고 있었지요. 초나라는 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경계해야 한다는 파와 진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편 초나라에는 굴원(屈原)이라는 대부가 있었는데, 그는 진정한 충신으로서 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초나라의 정국을 좌우하는 건 친진파(親秦派)였습니다. 결국 굴원은 모함을 받아 쫓겨났고, 초나라 왕은 진나라 땅에서 죽었습니다. 굴원은 멱라수 강가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읊조렸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어서 결국 쫓겨났구나.”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어부가 말했습니다. “온 세상이 혼탁하다면 왜 그 흐름을 따라 그 물결을 타지 않으십니까? 모든 사람이 취해 있다면, 왜 그 지게미를 먹거나 그 밑술을 마셔 함께 취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굴원은 말합니다.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털어서 입는다고 했소. 사람이라면 그 누가 자신의 깨끗한 몸에 또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하겠소?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서 장사를 지내는 게 낫지, 또 어찌 희디흰 깨끗한 몸으로 속세의 더러운 티끌을 뒤집어쓰겠소?” 그러고는 돌을 안은 채 강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1)

세상이 혼탁하고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 깨끗하고 깨어 있다고 한탄하는 굴원에게 한 어부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세상이 혼탁하다면 당신도 그 혼탁한 물결을 타고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가,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다면 당신도 술 찌꺼기라도 먹어 함께 취하지 않는가? 홀로 깨어 있어 봐야 당신만 손해다. ‘대충 세상 시류에 편승해서 편하게 살아라...’ 이런 이야기겠지요. 조선 개국에 방해되는 정몽주를 만나 이방원이 읊은 시조도 그런 의미이겠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어울려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홀로 독야청청(獨世靑靑)하겠다는 사람들을 불편해 합니다. 모두 술 취해 흥청망청하는데 취하지 않고 깨어 꼿꼿하게 있는 사람이 탐탁지 않은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흠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흠집을 내어 ‘너도 똑같은 놈이구나.’ 라고 해야 마음이 좀 놓이나 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은 혼탁한 세상에 적당히 젖어들어 함께 흘러가자는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고, 깨끗하게 하느님의 진리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흥청거리며 술에 취해 욕망이 주는 쾌락만을 추구할 때 칼날같이 깨끗한 정신으로 깨어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제시해 준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순교’의 의미는 무엇일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은 없습니다. 과거엔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순교였습니다. 오늘날의 순교는 매일의 일상에서 세상이 주는 재미와 쾌락만 쫓아가는 욕망에 맞서 작은 진리를 추구하고 신앙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1) 사마천, 『사기(史記)열전』, 「굴원기생열전」, 을유문화사, 443~444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