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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2)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다른 나라에는 왜 어른이 없을까?

말 습관이 잘못 든 것 같습니다. 한 두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점잖은 분, 다른 문화에 익숙한 분들도 그렇게 합니다. 외국인을 지칭할 때 미국 ‘애’들은 어떻고, 유럽 ‘애’들은 어떻고, 일본 ‘애’들은 어떻다고 합니다. 외국인이 죄다 미성년자는 아닐 텐데 무턱대고 애들입니다. 외국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조리 ‘놈’으로 부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미국놈, 중국놈, 양놈, 여기에 더한 멸칭을 붙이는 경우도 왕왕 있지요. 한국 사람이면 적어도 ‘씨’나 ‘님’ 같은 호칭을 붙여서 부를 텐데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무시하고 외국인이라면 그냥 이름만 부릅니다. 물론 대다수는 말을 그렇게 할 뿐이지,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우리 사회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것은 소중한데…

몇 년 전부터 ‘국뽕’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심심찮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자아도취적인 ‘우리’ 찬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계가 한국을 우러러 본다며 집단적 자부심을 한껏 차오르게 하는 ‘국뽕’ 유튜버들은 대체로 비슷한 어휘를 남발합니다. 밥상 위에 반찬 개수부터 시작해서 온갖 신뢰 하기 힘든 자료까지 내세우며 충격, 공포, 화들짝, 경악, 난리, 믿을 수 없다 같은 수식어들을 붙입니다. 한국이 무엇을 생산하면 전 세계가 충격과 공표 속에 벌벌 떨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경악하며 난리가 난답니다. 일본이 당황하고 중국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언급은 양념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민족이고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강변하는 이런 현상은 타국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심리와 결합될 때 독일의 나치즘 같은 전체 주의,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다분합니다.

 

보편적 지평

“자기 민족과 문화에 대한 건강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지역적’ 나르시시즘”을 경고하면서 “그 이면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어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기 보호를 위한 방어벽 쌓기를 선호하는 폐쇄적인 정신이 숨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보편적인 것에 진정으로 열려져 있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다른 문화의 풍요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겪는 비극에 대한 연대 의식이 없으면, 건강한 방식으로 ‘지역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역적 나르시시즘’은 제한된 사고와 관습과 안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46항)

 

겁먹은 개가 크게 짖고 빈 깡통이 요란하듯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고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일수록 허세를 부리거나 이유 없는 우월감이나 열패감에 휩싸이기 마련이지요. 유달리 사치품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표출되는 우리나라지만 공정무역 같은 큰 흐름에서는 비껴나 있습니다. 공정무역은 ‘대화와 투명성, 존중에 기초해 국제무역에서 좀 더 공평한 관계를 추구하는 거래 기반의 파트너십’이라고 정의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이 4~5천 원쯤 하면 그 커피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3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윤 추구 외에 어떠한 윤리적 고려도 하지 않는 가격 결정 과정 때문인데, 공정무역은 여기에 개입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고 유통과정을 투명화해서 신뢰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세계적인 운동을 말합니다. 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한국은 무역 규모면에서 세계 8위에 해당하는 무역대국이지만 공정무역 시장은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도 작은 수준입니다.

또 다른 예를 볼까요. 과도한 소비주의와 폐쇄주의에 갇힌 시선은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다른 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산한 물건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다는 뉴스는 우리나라가 2019년 기준 세계 8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며 탄소 다배출 제조업 국가(맥킨지글로벌연구소)라는 사실을 가려 버립니다.

오직 재물에만 혈안이 되고 재물을 얻는 과정이나 분배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주위의 빈축을 사듯 돈푼깨나 있다고 없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국가나 민족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이 돈이라도 있어야 대접받을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처럼, 민족과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협력과 우애 대신에 돈으로 판단하고 돈에 의지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널리 번져 있습니다.

 

인종 편견과 인종 차별행위

돈 때문에 사람 보기를 우습게 아는 현상, 달리 말해 돈에 눈이 먼 세태는 한국 사회가 외국인들을 맞아들이는데 있어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사회든지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한국은 교육 수준이나 소득 수준을 고려했을 때 특이하게도 인종 편견이 매우 심한 국가입니다.(2013년 워싱턴포스트 세계 가치관 조사 참조)

 

2019년 대구교육대학교 배상식 교수의 논문은 생물학적-유전학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사회적-역사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종교적-문화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과 함께 이른바 ‘GNP 인종주의’를 언급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국가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인종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황인종, 비슷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는 동남아, 몽골, 중국 출신에 대해서 인종 차별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소득이 낮기 때문입니다. 또 백인이지만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처럼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출신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같은 민족인 조선족이나 고려인 후손, 북한 이탈주민에 대해서 심한 편견과 차별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사를 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심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가치

“세계를 향한 타당하고 참된 개방은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한 가족 안에서 자신의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웃 민족들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에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를 촉진하는 교육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모든 형제들」, 151항)

 

우리가 외국인,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돈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은 평소 한국 사회 안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형제들」 151항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참된 개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살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250만을 헤아립니다. 대구 인구에 필적하는 이 이웃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이웃, 그들은 우리를 차별과 고립의 울타리로부터 풀어주는 고마운 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