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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하다
소소함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수성성당보좌

이번 휴가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리저리 하는 것이 너무 많았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입 댈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휴가 기간 동안 매 끼니를 김밥으로 해결하려 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에겐 최고의 선택이었다.

 

환절기라 그런지 따뜻한 국물이 생각났다. 그래서 컵라면도 하나 샀다. 방 안에 앉아 TV를 보면서 느긋하게 먹는 등 마는 등 김밥을 입에 넣었다. 정말 완벽한 휴가의 첫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목이 간질거리더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있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싶었다. 따뜻한 물을 받아서 반신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계속 뒤척거리면서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선잠을 잤다. 온도 탓인지, 잠자리가 달라진 탓인지 자꾸 깼다.

 

물로 칼칼한 목을 축이고 난 후, 지인이 양성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코로나자가검사키트는 휴가를 즐겨도 된다고 알려줬다.

 

김밥만 사러 나가고, 다시 방안에서 오로지 쉬기만 했다. 다시 반신욕을 하고 잠을 청했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계속되는 두통과 근육통으로 잠을 설쳤다. 결국 확진이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의 글처럼 계획한 휴가였다.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가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1)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휴가를 떠난 것이었고, 밥 먹는 것조차도 귀찮게 느껴져서 김밥을 선택했다.

 

사제관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열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 잡고 벌여놓았던 짐을 쌌다. 사제관에서 남은 휴가 기간과 격리기간 동안 김밥은 먹을 수 없었다. 내 휴가는 이렇게 또 계획에서 벗어나 버렸다.

 

지리한 격리기간이 끝나고 김밥을 사 먹었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냥 계획대로 되지 않아 흘려보낸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김밥 한 줄에 차분해지는 내 마음을 바라보며, 의연함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기의 엄숙함을 피할 수 있는, 김밥을 먹는 시간이 필요했다.

 

‘힘 좀 빼고 살자. ’라는 동기 신부들의 이야기가 괜한 잔소리는 아니었다.

 

거창한 일 앞에서 김밥 한 줄은 큰 의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거창한 일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계획에서 벗어나 소소함을 마주하는 데에서 비롯됨을 느낀다.

 

어김없이 많은 계획이 어그러진 시간을 보냈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좌절했다.

 

김밥처럼 소소하지만, 나에겐 위로가 되었던 사람과 나날이 있었기에, 소주 한 잔에 ‘잊어버려라.’ 하고 좌절을 같이 아파하고 털어낼 수 있게 해 준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또다시 실패할 일들이 수두룩하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갈 시간이 또 반복된다.

 

그렇지만 김밥이라는 소소함이 지닌 큰 힘이 나를 또다시 살아내게 한다. 그리고 의연해지게 한다.

 

1) 김훈, 「라면을 끓이며」, 문학동네, 2015,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