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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3)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사람이 둘 이상 사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불평등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노력의 정도가 다르니까, 혹은 여건이 다르니 모두가 똑같이 누리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살 권리는 있지만 차이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없애면 안 되는 경우도 있지요.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일을 했거나 안 했거나 똑같은 빵 하나씩 받아먹는 것을 ‘공평’이라고 부르기 힘든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그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도저히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을 만큼 골이 깊어질 때 발생합니다. 탁월한 능력이나 남다른 노력, 많은 기여에 더 큰 보상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탁월하지 못하다 해서 누구도 벌 받듯 푸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정치는 그런 면에서 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대화와 합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장치입니다. 현대 민주국가라면 폭력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 정당한 분배의 규칙을 정하고 실행함으로써 불평등의 문제에 대처합니다.

 

앞서 두 달에 걸쳐 회칙 「모든 형제들」의 ‘제5장, 더 좋은 정치’가 비판하는 두 극단, 건강하지 못한 대중 영합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두 극단의 주장들은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그 해법으로 제시되는 대표적인 주장들입니다. 어느 쪽이든 일리는 있지만 한계도 분명합니다.

먼저 대중 영합주의는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분배에 중점을 두자고 합니다. 그런데 대중 영합주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당장 갈라 먹자는 주장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161항 참조) 그런 경우를 ‘건강하지 못한 대중 영합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반면 자유주의는 불평등의 문제를 각자 알아서 할 문제로 치부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자유로운 경쟁 속에 경제 성장을 거듭하다 보면 사회 전체가 나눠 먹을 부의 크기가 커져서 가난한 이들에게도 더 좋은 결과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는 이 양극단의 주장들 사이에서 타협과 합의로 이루어집니다. 회칙 165항이 말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책, 하나의 용인되는 방법론, 하나의 경제적 처방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회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드린 두 극단의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빠뜨리고 있는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먼저 대중 영합주의든 자유주의든 제도만으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치나 사회 제도를 아무리 효율적으로 만든다고 한들, 그것을 쓰는 사람이 잘못된 마음을 먹어서 허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회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법을 만들어도 편법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정의와 공정을 주장하면서 정작 정의를 주장하는 자기는 예외라도 되는 양 처신하는 ‘선택적 정의’의 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합니까?

회칙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인간적 나약함, 곧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탐욕’으로 부르는 것의 일부인 이기주의로 기우는 인간의 성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탐욕은 자신과 자신의 단체, 자신의 사소한 이익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의 성향입니다.”(166항)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제도도 인간 자체의 회개와 변화 없이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회칙은 먼저 인간의 이런 나약함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믿고 ‘마음과 태도와 생활 방식’(166항)을 바꾸자고 호소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는 쉽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방방곡곡에 교도소를 세우고, 교도소마다 죄인들을 꽉꽉 채워 넣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통 의인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칙은 더 좋은 정치를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더 좋은 정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무엇보다 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정치를 잘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엄정한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방대한 정보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합니다. 물론 치열한 정치 마당에서 한가롭게 사랑 타령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모든 사람을 우리 형제자매로 인식하고 포용하는 사회적 우애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그저 이상향이 아닙니다. 그 실현 가능성을 보장하는 효과적인 길을 찾는 능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180항)라며 정치의 근본을 상기시키십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앞서 반포된 회칙 「복음의 기쁨」 205항에서 참된 정치가 무엇인지 언급했던 구절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매우 숭고한 소명이고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 교리에서 영감을 받은 모든 노력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모든 형제들」 181항)

 

신앙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양한 집단 가운데서 특정한 세력이 권력을 획득해 정치 이념을 실현하도록 돕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이바지하는 것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신권 국가를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강력한 종교경찰이 종교적 의무를 법적으로 강제하면서 공권력을 남용하다가 젊은 여성의 목숨까지 앗아 간 외국의 사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치와 교회의 건강한 긴장 관계가 무너진 채 신앙의 이름으로 특정한 정당이나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행태는 더 이상 현대 사회에서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더 좋은 정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각자의 정치관과 태도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향하는 정치는 회칙 「모든 형제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사랑의 방법이 되고 있습니까? 정치를 논하고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조직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사회 제도들이 창출하는 다양한 자원을 통하여 멀리 있거나 무시당한 형제자매에도 닿을 수 있는”(165항) 참된 애덕의 실천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정치적 관심이 “실질적이며,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역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에 필요한 자원을 허비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까?(165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