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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나
-너
-우리가 기후입니다. ‘생태 사도들’로 사는 기쁨을 그리며”


글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예수님이 유럽에서 태어나셨으면 유럽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한반도 지역에서 태어나셨으면 한반도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실 것입니다. 열대에서는 열대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온대에서는 온대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시며, 남쪽 따뜻한 지대에서는 남쪽스러운 모습으로, 북쪽 추운 지대에서는 북쪽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달에서는 달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시고, 지구에서는 지구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기후와 분리가 불가능한 형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모든 기후는 구체성과 지역성을 띠고 나타납니다. 모든 존재 역시 구체성과 지역성을 띠고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구체성과 지역성을 띠는 기후 안에서 기후와 함께 기후를 통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각자가 들어서서 살고 있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형성되는 ‘기후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 기후와 인간 존재, 인간 존재와 기후는 존재 차원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상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언론과 교육 현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자연과 기후를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이산화탄소를 비롯해서 지구 온도가 올라가게 만드는 과도한 소비로 기후 변화를 발생시켜 놓고는 자신들에게는 별문제가 없는 듯이 기후가 변하는 것을 ‘문제’로 판단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기후와 기후 변화를 깊게 인식하고 여기에 복음적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지역 기후, 곧 ‘지역이라는 집’의 기후가 지역인의 존재와 갖는 상관성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가 직면한 기후 변화는 우리의 집의 변화이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밥과 몸의 변화를 발생시킵니다. 그러므로 기후 변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게 만듭니다. 기후가 변하는데 그 기후 지역에서 사는 존재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작년에 보셨던 배추와 배추벌레 기억나시는지요? 기후가 달라지는 대로 배추도 배추벌레도 달라집니다. 폭염이 오면 배추도 배추벌레도 기진하고, 갑자기 서리가 내리면 배추도 배추벌레도 업니다. 그래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배추도 배추벌레도 모두 기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집과 밥과 몸이 되어 주는 어머니 지구와 지구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사는 자녀 관계에 있는 우리도 모두 기후가 달라지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기후가 변하면 우리의 집도 밥도 몸도 모두 달라지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자신도 달라지게 됩니다. 기후와 무관하게 존재 할 수 있는 생명체는 아직은 없는데요, 우리는 기후로부터 단순히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후가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신이 기후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후와 인간 존재의 상관성은 창조계의 기본 물질들을 대변하는 지수광풍(地水光風)을 매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후 현상은 지수광풍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인간 존재는 지수광풍을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습니다. 지수광풍 밖에 인간의 존재는 없고, 지수광풍의 상호작용 산물인 기후 밖에도 인간의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지구에서 숨쉬고 사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 모든 존재에게 해당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에게는 기후와 지수광풍으로 다 해명되지 않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기후와 지수광풍과 갖는 상관성을 우리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과 일상에서 명시적으로 지켜 가는 것이 요청됩니다.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물음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앙 공동체에 던진 물음입니다.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1 코린 4,7) 실제로 지수광풍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어도 만들지 않은, 곧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우리가 받은 것들입니다. 흙을 예로 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흙 알갱이입니다. 그분이 당신 카리타스-사랑으로 먼저 있게 하신 빛(창세 1,3) 속에서 당신이 먼저 있게 하신 물(창세 1,1-2.6 참조)로 당신이 먼저 있게 하신 흙(창세 1,9)의 일부를 빚으셔서 당신이 먼저 있게 하신 바람(창세 1,1; 2,7 참조)을 통하여 당신 숨을 불어 넣어 주셔서 당신의 존재로 살게 하셨습니다.(창세 2,7) 아담이 하느님의 숨을 만나서, 곧 그분의 숨을 받아서 ‘네페쉬 하야’(nepesh haya, living being),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분 숨이 떠나면 우리는 다시 흙 알갱이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숨으로 사는 그분의 존재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흙 알갱이라는 것을 아는 존재는 복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E)는 질량(m)에 빛의 속도(c)를 두 번 곱한 양과 같다(E= mc²)고 했는데요, 자신이 하느님의 흙 알갱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이 mc²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축복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받는 에너지의 규모를 모르거나 왜곡하기 쉽습니다. 모르면 비굴해지고 왜곡하면 불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온도를 측정하기 시작한 1912년에 비해 온도가 1.8도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은 우리 자신이 이런 결과를 발생시켜 놓고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자연에서 받아서 살면서도 도리어 자연에서 받은 에너지로 자연을 파괴하면서 기후 변화를 발생시켜 왔고, 그러면서도 이런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 실재 앞에서 우리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도 둘째도 우리가 받은 것들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알고 깨달아서 감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그분의 흙 알갱이라는 것, 자기가 그분의 네페쉬 하야라는 것, 지금 그 분이 세워주신 바닥 위에서 그분의 숨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분의 빛을 받아 그분의 물을 마시고 그분이 주시는 밥으로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을 알고 감사하는 이들은 복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요르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가 나병에서 나았습니다.(2열왕 5,13-14) 그렇듯이 하느님의 은총의 강에 자신을 맡겨 감사를 회복할 때 생태 폭력의 질병에서 나아서, 하느님의 온 창조물과 함께 살 새 마음과 새살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기후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변하고 사회가 함께 변할 수 있도록 매개하면서, 오늘 우리가 직면한 기후 변화를 적어도 늦추고 하느님이 보시고 “참 좋다.” 하신 그 세계가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일에 헌신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생태 사도들’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원바닥이신 존재, 곧 하느님과 바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인 우리를 이어주는 바닥이 있습니다. 저는 이 바닥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바닥이라는 의미에서 ‘절대바닥’이라고 부릅니다. 이 절대 바닥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요, 이 절대바닥의 숭고한 형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십자가 바닥을 길 삼아 딛고 걸어 하느님 원바닥에 이르는 여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바닥, 온바닥이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셨습니다.(요한 1,14) 그 사건을 믿음으로 기억하는 날이 그분의 탄생일, 크리스마스인데요,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그분은 그분을 배척하는 존재에게 가시관으로 찢기고 못으로 뚫리고 창으로 찔리기까지 흠난 몸으로 당신 존재를 열어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으로 들어가도록 문이 되어 준 분이십니다.(요한 19,1-37)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문 삼아 그분의 집에 들어서서 원바닥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불린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십자가는 바닥이고 길이고 문입니다. 십자가 바닥을 자기의 길이요 문으로 선택하는 우리는 오늘이 기후 변화 시기에 자연 생태의 고난과 가난한 존재들의 울부짖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살이, 곧 복음 살이와 통합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49, 51항) 그리하여 고난받는 자연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분의 집에서 그분의 평화를 살 수 있도록 이번에는 우리가 그분의 생태 사도들로서 그분처럼 생명의 바닥이 되고 길이 되고 문이 되어 주라고 우리 주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르신 분이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있어 주시면서 희망의 길이 되어 주시고 위로의 동반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 충실하시고 자애로우신 주님께서요.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이야기를 〈빛〉잡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복된 여정을 마치면서 그동안 베풀어 주신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신이 사는 집과 자신이 모시는 밥과 자신이 받은 몸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21세기의 복음적 깨달음으로,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 가는 ‘생태 사도들’로 기쁘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빛 안에서 안녕히 계십시오.

 

* 그동안 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황종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