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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6장, 대화와 사회적 우애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다 알면서 하지 않는 일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적당히 운동하며, 음식은 골고루 먹되 과식하지 말고 술 담배는 절제하라. 누구나 아는 건강의 비결입니다. 알면서 실천은 하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지요.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기상천외한 건강식품과 영양제는 맹신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느 원시림이나 심해에서 건져 올렸다는 무슨 가루며 열매, 엑기스들이 넘쳐납니다. 식당만 가도 ‘OOO의 효능’이라며 만병통치의 영약처럼 써 붙인 광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고 보면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면서, 막상 실천하지 않는 생활의 지혜가 참 많지요. 하지만 그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사회적인 문제,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대화와 정치

정치는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움직이려면 먼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전문용어나 복잡한 통계 같은 것을 내세우지 않아도 말에 호소력이 있고 저절로 귀 기울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거나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 상대의 양보를 바라는 만큼 자기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서로 얼굴을 붉히도록 격하게 토론을 해도 돌아서면 뒤끝 없는 사람, 면전에서 뿐만 아니라 뒤에서도 한결같이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즐겁고 생산적입니다. 이렇게 좋은 대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공동체가 더 좋은 곳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단순한 진리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세상 물정을 논하는 자리에선 독설과 비아냥과 인신공격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듯이 처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현란한 수사와 정교한 논리를 쓴다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고 공감하고 동의해 줄 이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형제들』의 「제6장, 대화와 사회적 우애」는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할 때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들을 제일 먼저 언급합니다.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 서로 표현하기, 서로에게 귀기울이기, 서로 바라보기, 서로 알아가기,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공감대 찾기, 이 모두를 ‘대화하다’라는 말로 요약”(198항)하면서 회칙은 대화를 잃어버린 살벌한 정치판을 사회적 우애가 표출되는 건강한 공론의 장으로 바꾸자고 권고합니다.

 

진정한 사회적 대화

예전에는 언론이 사회적 의제들, 그러니까 함께 생각하고 의논해 봐야 할 주제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주로 언론에 나온 화제를 중심으로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인터넷의 소셜 미디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언론이 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서 쌍방향으로 의사소통이 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변화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든 형제들』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대부분 언제나 신뢰할 수만은 없는 매체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관계망의 열띤 의견 교환”은 “동시다발적인 독백들일 뿐”이고, “날카롭고 공격적인 어조로 의견을 제시”(200항)하는 것을 이른바 ‘사이다 발언’이라 여깁니다. “상대방과 존중 어린 열린 대화로 더 나은 종합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고자 하기는커녕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으며 곧바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악습이 만연해 있습니다. 매우 나쁜 것은 정치 유세의 언론 보도에서나 통용되던 언어가 일반화되어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201항) 교황님의 이런 지적이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공동선과 신뢰

이런 “대화의 결여는 이 개별 분야들 안에서 어느 누구도 공동선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권력의 특혜를 누리거나 기껏해야 자신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데에만 관심을 둡니다.”(202항) 사람은 거울이 없고, 사진이 없으면 자기 뒤통수조차 혼자 힘으로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만의 일이 아니라 공동의 일에 해결책을 모색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같이 일해보자 하면서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공격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말로는 같이 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쳐내는 이가 하는 말이 과연 공동선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회칙은 “진정한 사회적 대화는 다른 이들의 관점을 존중하는 능력을 전제”로 한다고 짚으면서 “상대방의 관점 안에 정당한 신념과 관심사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회적 대화의 기본으로 제시합니다.

 

인간 존엄성의 진리

그러나 진정한 사회적 대화가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대충 중간쯤에서 합의를 보자’고 어설프게 봉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대화하는 일은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게 힘들어서 ‘법대로 하자’며 대화를 회피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공방,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팩트 체크’에 열을 올리는 것도 진정한 사회적 대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상대방이 반론을 펴지 못하도록 팩트를 늘어놓으면 상대방의 입은 막을 수 있을지언정 함께 공동선을 추구하도록 마음을 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칙은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찾도록 권합니다. 아무리 관점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다 해도 “인간은 누구나 침해할 수 없는 신성한 존재”(207항)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회적 대화들은 이 인간 존엄성의 진리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따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문화, 다른 이를 알게 되는 기쁨과 친절

『모든 형제들』의 제6장은 진정한 사회적 대화들을 통해 인간 존엄성의 진리를 함께 확인하고 지켜 가기 위해서 다른 이를 알게 되는 기쁨과 친절을 삶으로 증거하자고 초대합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에게서 미래를 찾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기꺼이 나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나와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의 관점도 존중하면서 마음을 모아가는 것은 과정 그 자체로 이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일은 친절을 회복하는 것이지요.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으며 실천해야만 할 일입니다. 친절을 통해서 대화로, 대화를 통해서 만남으로, 만남을 통해서 진리에 나아가는 것,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그런 것이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