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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 하다
나이 듦에 대하여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 | 영천성당 보좌

종종 나이를 잊고 살아간다. 학생의 신분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아직까지 이십 대인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곤 한다. 그래서 나이에 맞지 않는 옷을 사고는 괜히 애꿎은 옷 때문이라고 핑계를 댄다.

“니가 벌써 서른 중반이가?”

간만에 만나는 집안 어른이나 부모님의 친구 분들에게 종종 듣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버무려진 말 속에서 서른을 넘어 마흔을 향하는 삶의 시간을 체감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벌써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와 같은 하소연을 위한 체감은 아니다.

어중간한 위치, 다시 말해 젊음과 성숙함, 그 중간의 자리에서 보내는 매일은 새롭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조금씩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큰 선물이다. 차마 생각지 못했던 것들,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 쉬이 건넬 수 없었던 말이 느껴지고 보이는 것은 이 중간의 자리를 살아감의 축복이다.

금호강에는 오리가 참 많다. 금호강변을 산책하며 풍경처럼 스쳐지나가는 오리의 모습에서 삶의 비애를 마주했다.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엉덩이를 드러낸 채 아등바등거리는 오리의 뒷모습에서 삶의 고달픔을 마주하는 내 모습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지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달라진 내 모습은 젊음과 성숙의 중간 속에서 계속해서 마주하고 싶은 순간이다.

막연히 지금의 나이를 엄청 크게 봤던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 세상 속에서 마주했던 지금 내 나이의 어른들은 참 큰 사람들이었다. 그때의 나이에 이른 지금, 나는 그 큰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작은 사람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곤 한다. 마음이 확고하여 스스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공자의 서른에 비하면 나의 서른은 참 더디고 미진하다. 물론 사제직이라는 직분은 이립(而立)의 뜻을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살아내게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그 큰 사람들처럼 스스로 굳건히 서 있지 못함을 삶의 미성숙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미성숙을 자책하진 않는다. 미성숙의 시간을 통해 만들어질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불혹의 시간을 기대 할 뿐이다. 완고함이 아닌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스스로를 지켜 나갈 그날이 기대된다.

가끔씩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불혹에 가깝거나 불혹을 살아가는 형들의 깊은 마음과 새로운 생각은 ‘불혹(不惑)’이라는 단어에 예의 없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나의 편협함을 일깨우곤 한다. 더 깊고 넓게 바라볼 수 있기에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사십이라는 숫자가 가까워지는 요즘, 사십이 결코 낡고 오래된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깊고 넓게 바라봄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숫자가 바로 사십이 아닐까 싶다.

〈빛〉 잡지가 불혹이 되었다고 한다. 사십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빛〉 잡지가 담아냈던 수많은 이야기는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하는 합리와 신속이라는 미명 아래 ‘글’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는 세상에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글의 힘을 믿는다. 불혹이 된 〈빛〉 잡지가 깊고 넓게 바라봄으로써 신앙에 새로움을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글을 통해 신앙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길 바란다. 조악한 글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글을 통해 〈빛〉 잡지에 자그마한 힘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