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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動)하다
좁은 세상


글 김관호 리카르도 신부|영천성당 보좌

세상이 참 좁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반가운 얼굴과 마주칠 때마다 촘촘하게 서로가 박혀 있는 이 작은 세상을 느낀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해 청년들과 연풍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성지 주차장에 들어서니 익숙한 본당의 차들이 주차장 에 가득했다. 복음화 과정 때 청주교구로 공소 파견을 나갔다. 공소 관할 본당부터 당시 본당 신부님이 계셨던 본당까지 혹시나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이날 연풍성지에는 청주교구 성지순례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인파 속에서 청년들과 성지를 걸었다.

 

“신부님!”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데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기억 속 저편에 있었던 수많은 얼굴을 떠올려 보니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인 것 같았다. “우리 애가 신부님한테 첫영성체를….”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 얼굴이 선명해졌다.

 

야무진 손과 발로 율동을 열심히 따라하던, 찰고 때 자신있는 기도를 해 보라는 말에 ‘식사 전 기도’를 자신있게 외우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피식’하고 웃었더니 부끄럽다며 울음을 터뜨렸던 아이의 어머니였다. 첫영성체를 마친 후 이내 이사를 가버려서 내심 아이의 자라는 모습을 더이상 바라보지 못해 종종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반가워서 아이를 찾았다. 야무진 손과 발을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 나와 우리 청년들의 단체 사진을 찍어줄 수 있을 만큼 훌쩍 자라 있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촘촘히 박혀 있는 이 좁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다시 한번 느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촘촘하게 묶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좁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신지 벌써 삼 년이 흘렀다. 할아버지의 장례미사를 집전하며 참 슬프고 아팠다. 이 슬픔과 아픔 이후 삼 년의 시간 동안 두 개의 본당을 거치며 많은 이별을 위로하고 애도했었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계실 것 같은 할아버지가 계신 납골당에서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나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 계신 분들을 함께 기억했다. 할아버지를 납골당으로 모신 그때,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 계신 분들께 ‘우리 할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잘 지내세요.’라고 기도했기에 혹시 모를 마음으로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자꾸만 익숙한 이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왠지 장례 미사를 집전했을 것 같은 어르신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던 지난 강론을 찾아봤다. 느낌은 정확했다. 서품 받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그때 사제로서 첫 장례미사를 집전했던 어르신이었다. 손주들을 위해 기도하느라 반들반들해진 그 묵주알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어르신이 좋은 친구가 되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삶과 죽음은 머나먼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이어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분명 촘촘하게 묶어 주셨다. 그리고 촘촘하게 묶어진 이 세상 안에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가득히 넣어 주셔서 우리가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늘 가까이에서 서로를 기억하고 추억하며 다음을 기약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신 것 같다.

 

위령 성월이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이 우리를 갈라 놓아 슬프게 만든다. 하지만 이 거대한 벽이 아주 낮게 느껴질 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좁다.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게 세상은 좁게 만들어졌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그리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불어 넣어 주신 그리움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