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여는 글
부활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말과 글은 짧을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갈다.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일이 대부분의 일상을 채우는 나로선, 짧은 말과 글에 은근한 질투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애써 쓴 글이 늘어질수록, 다듬어 준비한 말들이 길어질수록 짧고 강렬한 단어 몇 가지에 대한 갈증은 지독하다.

부활을 생각하고 부활에 대해 쓰려다, 잠시 펜을 놓고 부활을 상투적으로 생각한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본다. 부활은 목적인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인가. 예컨대,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부활에 맞춰져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불쏘시개 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되어 버리는가. 이것이 부활에 대한 마지막 말마디여도 좋을가.

복음서들은 마지막 부활의 장면에서 ‘빈무덤’을 소개한다. 수많은 에피소드들로 엮여진 복음서의 끝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부활의 사실 관계를 보도하지 않는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빈무덤을 참배한 초대 교회의 예식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되새겼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죽음의 공간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그래서 빈무덤은 우리가 보고자 듣고자 감각으로 느끼고자 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그리하여 부활은 내가 설계하고 찾아나서는 목적도 희망도 아니라는 것, 비어 있는 곳에서 부활에 대한 생각은 다시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말과 글을 대할 때, 상상을 한다. 말과 글이 짧아져 더 이상 표현의 면이 드러나지 않을 때, 표현 너머 의미의 세계는 어떠할까. 말과 글이 없어 텅빈 공간이라면 우리가 침묵할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없을 때, 그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어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는가.

요한 복음은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가 빈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전한다.(요한 20,8)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믿었는지 특정하지 않는 요한 복음은 ‘보다’와 ‘믿다’라는 동사를 부활을 상상하는 자유로운 주체를 요청하는 데 사용한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보고 믿음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더 이상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더 이상의 표징과 사건에 얽매이지 않아 보는 것과 듣는 것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들을 마지막으로 요청한다.(요한 20,29)

말과 글이, 수많은 다양한 사건과 상징들이 모두 사라진 곳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이 다다르는 곳이 아니라 다다르지 못하는 가능성의 시공간에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부활을 상상하는 것은 있음직한 것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있다는 것의 한계를 깨닫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부활은 경험칙으로 무수히 반복되는 편안함이 아니라 얼마간의 이질감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새롭게 규정된다. 꺼릴만큼 이질적이지 않고 지나칠 만큼 두렵지 않은,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묘사해 보고 찬찬히 상상해 보는 조심스런 빈공간이 부활이 된다.

그래서 부활은 끝끝내 채워지지 않는 빈공간이다. 채우려 드는, 보고야 말겠다는, 그래서 안심하겠다는 우리의 열정이 두터워질수록 부활은 가볍디 가벼운 호기심의 소재가 될뿐. 채울 수 없는 부활의 빈공간 안에서 무수히 흩뿌려 놓은 말과 글들을 주워다 소각해 본다. 그리고 겨우 한마디, 모든 글과 말들이 응축되어 터져 나오는 딱 한마디, 부활의 아침 빈무덤의 막달레나가 외쳤던 그 한마디로 부활을 만난다. “라뿌니!”(요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