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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곶 됴쿄 여름 하ㄴㆍ니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문화홍보실장

「교수신문」은 해마다 연초에 ‘희망의 사자성어’를 뽑고, 연말에는 한 해 동안 사회상을 특징짓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합니다. 지난 2016년 초에는 한자로 된 사자성어 대신 아름다운 순우리말이 선정되었는데, 바로 “곶 됴코 여름 하느니”라는 구절입니다.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도다.”라는 뜻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으로, 조선왕조의 창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좀 더 보면 이렇습니다.

 

“불휘 기픈남ㄱㆍㄴ ㅂㆍㄹㆍ매 아니 뮐·ㅆㆎ, 곶 됴코 여름 하ㄴㆍ니

ㅅㆎ미 기픈 므른 ㄱㆍㅁㆍ래 아니 그츨ㅆㆎ, 내히 이러 바ㄹㆍ래 가ㄴㆍ니.”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이 좋고 열매가 많도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니, 내를 이루어 바다에 이르도다.)

 

근본이 바로 잡혀야 모든 것이 형통하리라는 의미입니다.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모진 바람(시련)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도 그 근본인 샘이 깊어야 가뭄에도 쉽게 마르지 않고 내를 이루어 흐르고 흘러 바다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근본이 바로잡혀 어떤 시련이 와도 이겨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2016년의 새날을 열면서 소망했던 국민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국가의 경제, 정치, 교육, 문화 모든 것을 그 근본부터 바로잡아 튼튼히 하여 아름답게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글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혼란 속에 2016년을 마무리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광장은 촛불로 뒤덮였습니다. 한 개인에게서 비롯된 여러 분야의 엄청난 비리들이 국정을 마비시켰고 집권여당은 분열되었으며 국가경제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2016년을 마무리하면서 대학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입니다. 전국시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의 이야기입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이니, 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 있다.” 2500여 년 전에 벌써 민본 주의(民本主義) 정신이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2항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배를 띄우는 힘은 물에 있고, 정치인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꽃이 자기 힘으로 예쁘게 피었다고 생각하거나 열매가 자기 능력으로 맛있게 열매 맺었다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겠지요. 꽃과 열매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건 땅속에 파묻혀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하는 뿌리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가 자기 잘난 능력으로 떠다닌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물이 밑에서 받쳐 주고 있기 때문에 배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곶 됴쿄 여름 하ㄴㆍ니”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중 시 한 채 나무의 근본(뿌리)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면 결코 꽃이나 열매가 제대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꽃과 열매를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묵묵히 밑을 받치며 일하는 뿌리가 깊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활동을 하고 봉사도 하지만 모든 화려한 활동의 내면에는 신앙심이라는 뿌리가 깊어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신앙심은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채 이런저런 활동에만 바쁘다면, 꽃이 화려하고 열매가 풍성하기를 바란다고 한들 제대로 꽃피고 열매 맺지 못할 것입니다.

2017년에는 근본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나의 신앙이 굳건히 뿌리 내리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올 해를 마감하는 날, 한 해를 되돌아보며며 “곶 됴쿄 여름 하ㄴㆍ니”라고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