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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바람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2017학년도 고입설명회에서 참석한 학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명문대학의 학력은 가졌지만 이기적이며 고집이 세며 인간관계가 서툰 사람과 평범한 대학을 졸업했지만 원만하고 밝은 성격에 예의 바른 젊은이 중 누구를 며느리나 사위로 삼으시겠습니까?”

참가한 학부모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명문대학 출신에 인성도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내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갑자기 망설여진다. ‘인성 교육을 중시하고 우리 아이가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 학교’라고 가슴으로 말하고 있지만 머리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대학 진학’이라는 목표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내신 성적에서도 유리하고, 수능준비도 잘 시켜 주고, 학생부 기록도 충실히하여 대학 진학의 성과를 내는 학교인가?’라는 잣대로 학교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신 성적은 상위권이 두터우면 불리하고 수능 준비를 잘 하려면 치열한 경쟁이 필요하기 때문에 동시에 충족되기 어려운 조건으로 머리가 복잡하여 이 학교 저 학교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 학교에서 우리 아이가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 학교는 어떤 철학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가?’, ‘선생님들과 우리 아이들의 호흡이 잘 맞을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우선 순위에서 한참이나 아래에 두고 있다. ‘사람교육’, ‘스토리가 있는 학습’, ‘모두가 일등인 학교’ 등 뜬구름 잡는 나의 이야기가 이 부모님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을 것이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우리 부모 세대가 살아온 대한민국은 능력보다는 학벌을 중시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보다는 학연이나 지연 등 인맥에 의해 좌우되며 청탁이나 접대에 취약한 사회였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에게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줄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다그치는 것이 부모들이 해야 할 최소한의 유산처럼 여겨졌다. ‘부’와 ‘권력’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평범한 소시민에게 계층 이동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 ‘학벌’이라고 확신한 까닭이다.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서민들이 대접받고 소중하게 취급되었던 시절은 눈에 띄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나 명예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면서 계층이동의 욕구는 더 강력했다. 그 결과 공교육은 오로지 대학진학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성적’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먹구름처럼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을 뒤덮은 시간이 너무 길었고 그 부작용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 과정에 상관없이 오로지 성적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대학입시의 당락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교육의 열풍에 휩싸였다. 초등학생들조차 온갖 종류의 사교육에 얽매여 학교수업이 파한 후는 물론 주말까지도 숨 돌릴 겨를 없는 생활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있다. ‘야간 자율학습 면제권’이라는 것이다. 이 티켓을 제출하면 야간 자율학습을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다. 이 한 장의 티켓을 획득하려고 포인트를 쌓기 위한 까다롭고 힘겨운 활동에 기꺼이 참여한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행운권 추첨을 하는데 어떤 값비싼 상품보다 이 면제권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가 잘 안 되었다. 이들에게 야간 자율학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 ‘과외 면제권’이나 ‘학교 등교 면제권’ 같은 티켓을 만든다면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하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속살인 것이다. 부모님에게 절실한 것은 아이들의 현재의 행복이 아니라 미래라고 말할 것이다. 그 효과가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최소한 도리를 했다는 명분을 위해서도 내 아이만 사교육에서 제외시킬 용기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은 참 고단한 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연구위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사교육이 학업성적향상에 영향이 있다고 분석됐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부터 사교육의 성적향상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해 2학년 이후에는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고등학교 3학년 때 사교육을 1시간 더 받을 때마다 수능 점수는 평균 0.35∼1.54점(100점 기준)씩 높아지지만 스스로 1시간을 더 공부하면 1.8∼4.6점씩 더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 했다. 다시 말하면 집중해서 공부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의 효과가 사교육 3배 이상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2004년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생 1,363명의 공식 수능 점수와 사교육 시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고3때 주당 1시간 사교육을 더 받으면 언어 영역은 0.52(100기준), 수리 영역은 1.54, 외국어 0.35씩 각각 수능 순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원 수업과 과외를 받지 않고 학교수업과 인터넷 수능 방송 등으로 혼자 주당 30시간 이상 공부를 했다고 밝힌 고등학교 3학년들의 수능 점수는 28.42(100기준)나 높았다.

 

학교현장에서도 이러한 결과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경험들이 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 근무할 때이다. 성적을 걱정하여 기숙사를 퇴소하여 사교육의 기회를 가진 아이들과 꾸준히 기숙사에서 생활한 아이들의 성적향상을 살펴보면 기숙사에 잔류하여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가진 학생들이 월등히 높은 성장을 보인다. 그리고 교육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학습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한 성장의 경험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자존감이 인생을 행복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취한 성적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장점과 소질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미국의 칙센트 미하이 교수는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몰입’이라고 했다. 어떤 것에 몰입할 때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고 몰입의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을 가치있다고 여길 것. 둘째, 자신의 선택으로 일할 것. 셋째, 그 일을 잘 할 만한 지식과 기술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을 것. 넷째, 그 일을 통하여 성공의 경험이 쌓이고 향상되고 발전하고 있음을 느끼는것 등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논리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초점을 둔 실험은 끝내야 한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 스토리가 있는 교육, 학생 장점을 발견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경쟁을 통한 좌절감보다는 개개인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모두가 일등이 가능한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나라 교육의 풍토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만든 획일적인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듯이 몰아가는 교육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지 말라.’, ‘교사가 할 일은 아이들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를 잘 하면 인성이 갖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갖추어지면 중요한 일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실패의 존귀함’을 인정하여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