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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토끼인형
-교회 사랑실천(Caritas)에서 서로 돕는 관계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제가 가진 물건 가운데 보물 1호는 색 바랜 낡은 하늘색 토끼인형입니다. 이 토끼인형이 제게 보물이 된 이유는 그것을 제게 준 사람과의 만남 때문입니다. 그는 독일 노숙인이었습니다. 그를 만난 곳은 당시 제가 살았던 독일의 작은 도시 프라이부르크 기차역에 있는 고가차도였습니다. 그날 저는 아내와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 제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저는 당시 한국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가 공동 운영한 카리타스학(사회복지, 사랑실천에 관한 신학) 대학원 과정의 한국측 실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같은 학과를 설립해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공동학위를 주기로 한 것이 외부상황 때문에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그 과정을 마친 분들께 학위를 수여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나름대로 우리 교회를 위해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 제 공부를 제쳐두고 1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쳤는데 그렇게 되어버려 사방에서 비난만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로부터 독일에서 학위를 줄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이루어져 너무 기뻤고,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모두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차 승강장에 내려 전차가 다니는 고가도로 위로 올라가서 앉을 곳을 찾다가 한 사람만 앉아 있는 벤치를 보았습니다. 앉아 쉬려고 갔더니 봄날치고 꽤 쌀쌀한 날씨에 얇은 운동복만 입은 40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1.5리터 포도주 팩(독일에서는 주로 요리할 때 쓰는 아주 싼 포도주를 종이 팩에 넣어서 팝니다.)과 때가 꼬질꼬질한 테니스 가방이 놓여 있었고, 발치에는 옷가지가 담긴 비닐 쇼핑백 2개와 빈 포도주 팩이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인사를 하면서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 앉았습니다. 앉자마자 그는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이어서 “돈 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지갑에는 여행 비상금으로 가지고 간 200유로(당시 환율로 한화 30만 원 정도)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한 달 식비였습니다.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지만 돈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두 개비 남은 담배 가운데 한 개비를 그 사람에게 주고 같이 피웠습니다.

 

“쿵푸를 아느냐?”, “안다.”, “나는 ‘부르스 리’를 아는데 너도 아느냐?”, “안다.”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고받는 것 같아 그만 일어서려다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답지 않게 아주 맑은 눈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차츰 신상에 관한 이야기도 주고 받았습니다. 고향, 이름, 나이, 살아 온 사연 등을 서로 묻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어디서 자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잠자는 곳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노숙하는 사람이 처음 본 사람에게 잠자리를 알려주는 것은 낯선 사람에게 자기 침실 열쇠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물어 본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제게 무엇이든 선물하고 싶다고 하면서 테니스 가방 끈에 단단하게 묶어 둔,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헝겊으로 만든 하늘색 토끼인형을 풀려고 했습니다. 추워서 손이 곱았는지 쉽게 풀지를 못해 이로 물어서 풀고 있었습니다. 그 인형이 그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인형 대신 담배나 한 개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몇 개비가 든 담배 갑을 제게 주고 난 다음에도 그 인형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토끼인형을 받아들고 고민할 때, 기다리던 전차가 왔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곁에 머물러서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전차는 30분이나 기다려야 해서 그와 작별을 하고 결국 전차를 탔습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 수 없는 마음의 떨림을 느꼈습니다. 아내가 잠든 후 집 앞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는 지금 역 근처에서 추위에 떨며 잠을 청할 텐데 저는 이 집에서 편안하게 잠들겠군요. 그를 지켜 주십시오. 사회복지사인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못 주었고 진실하지도 못했는데, 노숙인인 그는 자신에게 무척 소중한 것을 제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는 왜 그것을 제게 주었을까요? 당신은 왜 그를 제게 보내셨습니까? 노숙인의 모습으로 제게 온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습니까?’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 물었습니다. 그 후 여러 번 기차역으로 그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왜 그가 제게 토끼인형을 선물했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저는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먼저, 모든 만남은 근본적으로 선물이지 전문기술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복지 실천에서 가장 기본은 상대방과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회복지사는 의식적으로 여러 기술을 통해 그런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선물인 만남이 ‘해내야 할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를 만난 후부터 그런 생각이 들면 토끼인형이 제게 “아냐, 만남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선물이야.”라고 말해줍니다. 두 번째로, 좋은 만남은 서로 주고 받는 물건 그 이상의 열매, 곧 자신과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제게 토끼인형을 선물한 그는 최소한 그 순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줄 수 있는 사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룬 일에 도취되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넘어서는 사람과의 만남에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와 저는 이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종, 외모, 경제적 격차를 넘어 서로에게 감사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그 만남에서는 주기만 하는 사람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선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신자 사회복지사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곤경에 처한 사람도 타인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가 스스로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나눌 수 있도록 동반하고, 그것을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임을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 이번 호부터 ‘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연재를 맡은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도건창 소장은 오스트리아 비인(Wien)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사목신학을 전공하고, 독일 프라이부르그(Freiburg) 알베르트 루드비히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카리타스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현재 대구대교구, 광주대교구, 대전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제주교구에서 가톨릭사회복지 직원교육을 하고 있으며,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와 다수 수도회에서 사회복지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