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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오프닝 이미지(Opening Image)


글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

영화 평론이 홍수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을 수 있는 평론은 오히려 낯선 것이 되었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영화에 대한 평가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있다. 더구나 블로그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는 영화를 본 관객 스스로를 잠재적인 평론가가 되게 했고 그래서 각자의 생각들은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온다. 영화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굳이 나까지 그 홍수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월간 〈빛〉잡지를 읽으시는 독자들에게 내 평론이 꼭 필요 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런 저런 것들을 영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풀어나가면 괜찮을 것 같다. 친구들과 산책을 하면서 가볍게 나누는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 섞여 나오는 영화이야기처럼 말이다.

 

영화에 관한 글을 부탁받은 이유는 미국에서 2년 동안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유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시 언어였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교포사목을 하면서 나름대로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지내는 미국 사람들에게 지금 나의 영어실력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모두 가능하다고 했다. 입학 후 수업을 들으면서 나에게 해주었던 그들의 대답이 미국인 특유의 아주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격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에 관한 평론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영화를 제작하는 ‘필름메이킹(Filmmaking)’ 과정이었기 때문에 수업현장에서 알아듣고 답해야 하는 상황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나리오 수업(Screenwriting class)’이었다. 각자가 감독할 영화에 대한 시나리오를 발표하면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그것에 관해 평가하고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이미 알고 있거나 보았던 영화라면 그나마 이해하기가 수월했을 텐데 새로운, 더구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를 영어로 이해하고 질문과 평가까지 해야 하니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수업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2월에 귀국해서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영화와는 관련이 없다. 유일하게 영화에 대해 3분 남짓 말하는 시간이 있는데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1박 2일 동안 진행되는 ‘인성캠프’이다. 프로그램 중에 학생들이 인성(人性)에 관해 짧은 영화를 만드는 시간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배우’ 혹은 ‘감독’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답은 ‘이야기’이다. 영화란 ‘비주얼 스토리(Visual Story)’, 즉 보이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인기 있는 배우가 나온다 하더라도,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화려한 특수효과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관객들의 흥미와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배우들의 캐스팅과 공격적이고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개봉 초기에 잠시 관심은 얻을 수 있겠지만 이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반면에 개봉 초기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소위 말하는 ‘입소문’의 힘으로 점점 관객이 몰리고 때로는 재상영을 요구받는 영화도 있다. 결국 영화의 힘은 이야기의 힘에서 비롯된다. 물론 좋은 영화에 있어서 감독의 연출력이나 배우의 연기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연출력이나 연기력은 좋은 이야기에서만 가능하다. 수업 중에 시나리오에 관한 수업이 힘들고 비중도 많았던 이유는 영화에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이야기’의 비중은 본질 자체이기 때문에 연출하는 감독에게 이야기의 시작은 가벼울 수 없다.

 

어두운 영화관, 스크린에 빛이 들어올 때 우리는 잔뜩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설렌다. 그리고 각 영화마다 길게 혹은 짧게 그 이야기에 관한 첫 인상을 남기는 데 그것을 ‘오프닝 이미지(Opening Image)’라고 한다. 2016년에 ‘립반 윙클의 신부(A Bride For Rip Van Winkle)’ 라는 영화로 12년 만에 국내 관객을 찾아온 ‘이와이 지’ 감독의 1995년 연출작 ‘러브레터(Love Letter)’의 첫 장면은 ‘오프닝 이미지’에 관한 훌륭한 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과 심지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각종 패러디로 인해 기억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Climax)’에서 여자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십니까?)’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프닝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자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는 새하얀 눈 위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숨을 참고 있다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일어나 검은 코트에 묻은 흰 눈을 털어내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조난을 당해 죽은 남자친구인 ‘후지이 이츠키’(가시와바리 다카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로 내려가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톤(Tone), 분위기(Mood), 스타일(Style), 그리고 주인공’을 보여준다. 감독은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숨을 참는 장면을 ‘클로즈 업 샷(Close up shot)’으로 처리해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잃어버린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아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반면에 홀로 산을 한참동안 내려가는 장면은 공중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하얀 눈 속에서 아주 작게 보이도록 ‘버드 아이즈 뷰(Bird eyes view)’ 형식으로 촬영해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그려냈다. 검은색 코트와 하얀 눈, 상반된 카메라 앵글들을 통해 묘사된 ‘오프닝 이미지’는 이 영화의 주제인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전해주고 있다.

 

2017년 새해 첫 달인 1월은, 올 한 해를 한 편의 영화로 생각한다면 ‘오프닝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어두운 스크린 앞에서 느끼는 호기심과 설렘은 새로운 한 해, 첫 달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러하다. 열두 달이라는 러닝타임에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처음 보는 영화가 그러하듯 우리 각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사랑과 갈등을 하고 여러 가지 사건들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영화보다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결국 영화가 ‘보이는 이야기’이듯이 우리의 삶도 다름 아닌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기는 것은 ‘클라이맥스(Climax)’이듯 어쩌면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의 달성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프닝 이미지’가 영화 전체의 톤, 분위기, 스타일, 그리고 이야기를 그려 나갈 주인공을 짧지만 함축적으로 담아 소개시켜주듯 한 해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달에는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클라이맥스’에 대한 강박보다는 차분히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를 바라보면서 올 한 해의 톤, 분위기, 스타일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 회화, 다이어트, 금연, 금주’ 같은 새해 첫 달에 세우는 반복적인 실패와 자괴감을 일으키는 목표들은 이야기에서 ‘클라이맥스’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올 한 해 펼쳐질 나의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그리고 그 이야기를 결정할 톤, 분위기, 스타일을 알아내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 단순함에서 온다. 서두르지 않는 단순함은 나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기억시키고, ‘쓰고 싶은 이야기’와 ‘쓸 수 있는 이야기’ 사이에서 오는 흥미로우면서도 구체적인 ‘오프닝 이미지’를 그려줄 것이다.

새로운 한 해,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에 설레는 첫 달, 각자의 멋진 ‘오프닝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려 나가길 소망한다.

 

* 한승훈 신부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002년 사제수품. 2013년에서 2015년까지 미국 뉴욕 필름 아카데미(New York Film Academy)에서 필름메이킹(Filmmaking) 과정을 공부하고 MAF(Master of Fine Arts)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