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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루카 2,16-21.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16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201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축복 받는 은혜로운 한 해가 되십시오. 모두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해마다 새해 첫 날이면 그랬듯이 올해도 교회는 어김없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부터 그 문을 엽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의 축일로 시작하는 새해 첫 날의 복음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에서 마리아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오래 깊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탄생을 전해 받은 첫 번째 사람들인 목자들은 당시 사회의 소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맨 처음으로 구세주가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받게 되었다는 것은 구세주는 누구보다도 먼저, 바로 소외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 첫 날, 교회가 이 복음을 들려주는 것은 올해도 어둡고 그늘진 곳에 고통당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오래도록 깊이깊이 간직하는 마리아의 마음가짐으로 이 한 해를 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첫 마음을 살았던 분입니다. 성모님의 순종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말 한 마디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키우시면서, 또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마지막 십자가상의 죽음을 지켜보시면서 하느님께 드렸던 첫 번째 기도인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동정 잉태를 받아들이던 첫 마음을 잃지 않았기에 당신의 삶을 지켜내실 수 있었고, 결국 우리가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과 관련된 신비스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이전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의 탄생을 알렸을 때도 마리아는 그 인사말이 무슨 말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셨습니다.

이처럼 신비에 대한 마리아의 자세는 언제나 “침묵” 가운데 시작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줄곧 마리아의 삶을 이끌어 왔고, 이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침묵과 고요함이야말로 모든 시작의 분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침묵과 고요는 예수님의 일이 펼쳐지게 하는 보금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거나 치유하기 전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침묵의 고요한 분위기에 머무르셨습니다. 거기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마음에 간직하고 계시는 구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새해 첫 날입니다. 여러분은 새해 첫 날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어떻게 시작할 생각이십니까? 우리가 오늘 가지는 첫 마음이 며칠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요란한 구호나 사람의 혼을 빼는 시끄러움이 아니라 천주의 성모가 되신 마리아의 깊은 침묵으로부터 새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배웠으면 합니다. 기도드립니다.

“성모 마리아, 우리의 어머니. 새롭게 시작되는 올 한 해를 어머니의 침묵 안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희를 품어주시고 저희를 지켜 주십시오.”

 

* 이번 호부터 주일복음묵상 연재를 맡은 박광훈 신부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001년 사제수품,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로 있습니다.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로, 말하자면 성탄을 공적으로 알리는 축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동방에서부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멀고도 험한 여정을 걸었던 세 명의 동방박사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들이 걸었던 길은 진리를 찾는 길이자 믿음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이 땅에 강생하신 성자 예수를 알아보았고 경배 드렸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경배 이야기를 오늘 공현 대축일에 전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빛이요 참 진리이시라는 사실,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의 빛”으로 계시되셨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진리를 찾는 현자들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이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그 별이 자신들을 진리로 인도해 줄 것이라 믿으며 그동안의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리웠을 것이고, 회의(懷疑)에 빠져 마음이 어두웠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했고, 그에게서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여정 동안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이 상상했던 것과 달리 권세나 지식, 학식이 있는 곳에서 찾아질 수 있는 분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점도 알아들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별의 인도를 따라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고을,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의 권력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을 지칭한 “가장 작다.”는 말은 인류를 향한 구원 역사에서 하느님이 택하신 기준입니다. 마침내 그들은 집안에 들어가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를 드립니다. 이제 그들의 여정은 끝나고, 아기 예수께 경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원의를 드러냅니다.

이어서 그들은 보물 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법령에 따르면, 신격화 된 임금만이 그런 귀한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선물들은 왕께 대한 순명을 뜻했습니다. 당신을 우리 임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당신의 신하들이니 당신이 바라는 대로 우리를 쓰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물들은 선물을 바치는 자가 선물을 받는 임금의 백성임을 인정하는 것이자 자신들의 생사가 왕에게 달렸음을 고백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공현 축일을 맞은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걸었던 길은 인간이 진리를 찾아 떠난 구도의 길이자 우리들 역시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 길을 걸어 이 세상에 강생하신 하느님을 만나 경배 드렸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보여주시며 우리 또한 세상에 진리를 가리켜 보이는 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의지하며 먼저 아기 예수님을 찾아 새롭게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며 우리 삶의 주권을 그분께 넘겨드리고 그분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공현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들과 함께 그분을 경배하며 그렇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이번 호부터 주일복음묵상 연재를 맡은 윤주현 신부는 대구 가르멜 수도원 원장으로,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페인의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를 지냈습니다. 현재 대전 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수원 가톨릭대학교와 서울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25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간했습니다.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 요한 1,29-34.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같은 상황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받은 느낌과 그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체험한 성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늘 우리는 복음 속에서 세례자요한을 만납니다. 하지만 요한의 모습은 조금 다르게 그려집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늘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회개를 외치던 예언자 요한의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요한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정말 중요한 증언을 합니다. 자신이 본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모습을 거울로 삼아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때때로 각자에게 주어진 직무와 그에 따른 역할과 같은 외적인 것만이 자신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말해주는 것은 스스로 체험하고 고백하는 모든 것이 됩니다. 그것들이 탄탄한 기초를 이룹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31절과 33절에 두 번이나 나오는 요한의 말에 머물러봅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장본인이었던 요한도 예수님을 직접 뵙고 또 세례 때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그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서 더욱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가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살아있는 증언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증언은 또 다른 신앙을 낳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세례의 은총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지속됩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르고 부족한 신앙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한 세례의 삶은 우리가 체험한 것을 고백하고 또 증언하는 삶입니다. 세례자요한의 모범을 따라, 우리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가 더욱 풍요롭게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 이번 호부터 주일복음묵상 연재를 맡은 김창현 신부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2016년 1월 사제수품, 현재 대구대교구 죽전성당 보좌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1월 22일 연중 제3주일 : 마태 4,12-23.

글 반 유딧 수녀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올해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앙을 되새기며 아름다운 국내의 성지를 순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성지순례라기보다 마치 소풍을 나온 듯 가벼운 마음으로 절두산에서부터 한강변을 걸어 도착한 새남터성당. 성당 1층의 벽면에 전시된 순교 성인들의 짧은 편지글 앞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걸음을 멈춘 그 순간, 한 소절의 글 하나가 전율하듯 가슴에 와 꽂혔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제일 좋은 몫을 주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조선교회는 어떤 공동체보다 아름다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숨을 거둘 때까지 그 나라의 선교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새남터의 순교자 성 유스토 신부님께서 1864년 6월 13일 알브랑 학장 신부님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선교 소명을 듣자 기쁨에 넘쳐 하셨던 말씀입니다. 무지와 가난, 그리고 죽음이 곳곳에 도사린 조선의 이 땅, 이곳이 머나먼 이국의 한 젊은 사제에게 아름다운 교회로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고난과 핍박의 한국교회를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하였을까?

문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4,16ㄴ)하는 오늘의 복음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가난한 조선의 땅을 비추던 ‘빛’, 그 빛을 보았던 우리의 신앙 선조들과 빛으로 성화된 순교의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빛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14절: 제1독서), 즈불룬과 납탈리지방 호숫가에 있던 카파르나움에 자리 잡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13절)

그 당시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은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어 살아왔던 곳으로 이교(異敎)문화가 성행하였던 지역이었습니다.(참조. 2열왕 15,29) 그래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그들과 이웃하여 살아가던 유다인들도 이교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유다인들은 그곳을 ‘이민족의 갈릴래아’로 일컬으며 멸시와 천대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 자리하시며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에게도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갈릴래아”를 선교의 출발점으로 삼으시며, 구원의 선포와 더불어 우리의 영육을 치유하십니다.(23절)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회개’는 무지와 가난으로 천대받고, 외면당하는 낮은 자들의 몫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나에게’ 하시는 구원의 선포입니다. 주님의 빛은 동방에서 서방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이나 밝히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뜻과 오만으로 꽉 찬 마음에는 닿지 않습니다. 회개는 완고한 나의 뜻으로부터 물러나 주님의 뜻(통치)을 받아들이고,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어 그분의 빛 속을 거닐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요?

또한 ‘하늘 나라’는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앞에 펼쳐졌습니다. 이렇게 펼쳐진 하늘 나라는 우리를 또 다른 ‘소명’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19ㄱ절)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어망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20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아버지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21-22절) 예수님을 “따라감”은 떼어 둔 어떤 시간, 여가(餘暇)를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어망을 던지던 손길을 접고, 손질하던 그물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생활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섭리에 나를 맡기며, 인간적 지혜와 꼼수가 아니라 어리석어만 보이는 십자가의 길에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참조. 갈라 5,22-26)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 가족과 목숨까지 내려 놓았습니다. 그 님들은 하늘나라, 그분의 통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더 큰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서슴없이 주님의 핏빛 길을 따라 가셨습니다. 그렇게 그 님들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한국교회를 ‘아름다운 교회’로 빛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 선조들의 굳센 믿음과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가만히 되뇌며 기도로 봉헌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ㄴ)

 

* 이번 호부터 주일복음묵상 연재를 맡은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의 반 유딧 수녀는 현재 대구 가톨릭 어버이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 마태 5,1-12ㄴ.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0년 전입니다. 성서대학을 졸업하신 분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례 중 오늘 복음 말씀이 이루어진 진복팔단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내부수리 중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팀들은 성당 옆, 야외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 멀리 갈릴래아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신자분들은 감동과 기쁨이 교차하면서, 미사 중에 웃고 울며 행복선언을 함께 듣고 묵상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는 2000년 전 예수님께서 행복선언하신 그 자리에서 미사를 드리고, 예수님께서 맡으신 공기를 맡고 땅을 밟고 바람을 맞고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복팔단 성당은 아니지만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복팔단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을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내용에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긍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신 것은 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좋은 일, 선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복팔단 중에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이 사람들이 왜 행복한가? 왜 예수께서는 이들을 행복하다 하셨는가?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박해를 받더라도 가난하더라도 슬퍼하더라도 모욕을 당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가난하다는 것 자체, 박해와 모욕 자체는 행복의 요소가 전혀 아니라 오히려 불행의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함께 하면 그것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을 압도하고 넘어서는 행복 그 자체 바로 하느님입니다. 이 얼마나 큰 복음이고 행복입니까!

아무리 큰 것을 가져도 더 큰 것이 눈에 밟히는 게 우리 사람인가 봅니다. 그래서 유한한 세상의 것으로 우리 행복의 마지막을 채우려 하거나 행복의 근원을 향해 세상의 가치를 파고든다면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그분의 모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향해서 열려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영원한 것을 향할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