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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1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다른 문화와 사상을 경험한다는 건 기존의 삶에 대한 반성이나 고민을 불러올 경우가 있습니다. 제 경우엔 프랑스 리옹에서의 삶이 그러한데, 학교를 오가는 길에 자주 만났던 리옹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과의 시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무시기 춥지 않으세요?”

“여기가 어때서?”

“그래도 따뜻한 곳에 가서 제대로 쉴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

 

저와 노숙인 사이에 몇 번 주고받던 짤막한 대화입니다. 잘 먹고, 잘 씻고, 무엇보다 잘 잘 수 있는 삶이 주교좌성당 앞 노숙인들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제 생각은 매번 대화를 나눌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제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노숙인들은 그야말로 사회적 ‘루저’들인 셈이지요. 아마 그 노숙인은 저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노숙인과의 대화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말… 기존의 제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준거가 어디에 있는지 되묻게 하는 말이고, 만약 그 준거가 하느님의 뜻과 자연스럽게 상응하지 않는다면 다시 제 삶을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현대적 국가 개념, 곧 영토와 백성과 국권의 틀로 이해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말로 나라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α)’인데, 임금이나 지도자의 통치권을 가리키는 말마디입니다. 이를테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는 이, 대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마태오 복음의 진복팔단에 보면 하느님 나라를 얻어 누리는 이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마태 5,3)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마태 5,10) 흔히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두고 유다 사회의 ‘아나윔(가난한 자들)’ 전통을 언급할 때가 많습니다. 제 삶을 오롯이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방향지운 이들을 ‘아나윔’이라 합니다. 예컨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고, 신약의 시메온과 한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서의 처지가 어떠하든, 그것이 가난이든 박해든 간에, 하느님의 뜻에 한 인생을 내어 바친 이들의 것입니다. 세상 안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다보면 숱한 박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많지요. 타협이 아닌 정직과 성실, 그리고 진리를 위해 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쉽지 않으니 그 삶이란 게 대부분 가난과 박해를 업보처럼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 역시 그런 ‘아나윔’으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노력들은 교회 역사 안에 끊임없이 등장했지요. 복음을 전하는 데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로부터 일상의 소소한 기도문을 빠뜨리지 않고 되뇌는 사람들까지 하느님 나라는 그 나라를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가난 속에서, 가난을 살면서 증거 되고 선포되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서 얻어내야 하는 게 하느님 나라라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내일 혹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염두에 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4)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간혹 신앙한다는 것을 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아직 참아내야 할 시간, 희생과 봉사로 먼 훗날 하느님 나라 입성을 위한 티켓을 확보하는 시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엔 아직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았으니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가져다 주셨고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예수님 덕택에 이미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았다 생각하는 건 예수님의 공생활을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닐런지요.

 

하느님 나라가 아직 이 세상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자세는 마치 노숙인을 저의 삶의 잣대로 함부로 대했던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건 아닐까 합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배고프고 억압받는 이들이 있고, 여전히 부조리에 희생당하고 불의에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는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멀었다는, 그래서 나라도 외치고 저항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수 있는 참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이른바 헐리우드 영화에나 나올법한 영웅주의적 태도말입니다. 하여, 노숙자의 말로 다시금 되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하느님 나라는 세상이 원하는 형태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에 구원을 이루셨지요. 신앙인은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으로 가난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지금을 우리 신앙인의 삶으로 증거한다면, 그것이 이미 하느님 나라를 이미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행복하고 보다 평화롭고 보다 윤택한 삶을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진대, 우린 왜 매번 ‘보다 나은 내일’을 전제로 지금의 부족함을 제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기 전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것이 내 눈에 하찮고 부조리하게 여겨지더라도 먼저 사유하고 묵상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마태 18,4.10)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마르 4,26-29) 이 세상이 불의하고 부조리가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섭리대로 선하고 정의롭고 조화롭게 창조된 이 세상의 질서를 우리 사람들이 소홀히 한 때문이지 하느님 나라 자체가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불의와 부조리 속에서도 저절로 자라나고 있습니다.(마태 13,24-30) 올바르게 살다가 가난해지고 박해받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지요. 현실을 이러쿵저러쿵 비난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재단하려는 교만을 내려놓고 본디 인간됨과 본디 지켜야 할 것과 본디 행해야 할 것을 찬찬히 살펴보는 데서 하느님 나라는 시작합니다. 교회는 불의에 항거하는 영웅들의 투쟁 장소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당신 뜻대로 머무시도록 준비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건설해야 할 무릉도원이 아니라 창조 때의 본 모습으로 회복해야 할 우리의 본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멋지게 만들어 놓은 본래의 나를 내팽개치고,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건 없는지,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이 세상의 논리에 저당 잡혀 사는 건 아닌지 자문하는 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