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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금메달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이솝 우화인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50대인 우리들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만났기 때문에 삽화와 함께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야트막한 야산이 무대였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건너편 언덕에 있는 나무까지 달리기를 제안한다. 어찌된 일인지 거북이가 이 불공정한 제안을 기꺼이 수락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토끼의 영리함 때문인지 아니면 거북이의 아둔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결과가 뻔한 내기가 성립된 것이다. 비록 숲속의 몇몇 동물친구들이 응원을 하는 장면이 있지만 토끼의 주 종목을 토끼의 홈그라운드에서 펼치는 이 시합의 결과에 대한 긴장감이나 흥미로움은 기대되지 않는다. 사실 이 게임은 종목 선정, 경기장의 조건, 평가 기준 등 무엇 하나 공정한 것이 없다. 선수의 구성으로 보면 최소한 육지와 강과 습지가 적절한 비율로 조합된 트랙에서 실시되어야 하고 달리기 보다는 경보경기 정도라면 수긍이 간다. 하지만 거북이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탓할 일은 못된다. 아마도 이 경기를 제안한 토끼는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종목의 경기를 통하여 숲속 친구들에게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것이고 거북이는 비록 경기에서 패한다고 하더라도 잃을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도전 정신을 드러내 보이는 기회로 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말의 반전을 통하여 교훈을 이끌어 내는 작가의 의도는 알고 있지만 농담 삼아 몇 가지 트집을 잡아 본 것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스포츠는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요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사냥이나 전쟁을 위한 역량은 집단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던 시대에는 달리기와 도약능력, 투척능력과 격투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겨루기와 승자에 대한 우대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대 스포츠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승부와 기록과 순위에 집착하는 대규모 국제 경기들을 보면서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일까? 100m 달리기 종목을 생각해 보자.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경기장을 만든다. 단순히 땅을 고르고 다지는 수준이 아니라 강도와 탄성이 최적화된 첨단 소재가 동원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파이크며 슈트며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인체에서 발산되는 열과 땀을 신속하게 배출하여 최상의 운동기능이 가능한 장비와 조건을 갖춘 공간에서 경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감각으로는 구분할 수도 없는 1/1000초라는 단위로 판독하여 기어이 순위를 구분한다.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많은 자본과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소수의 나라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무리한 예산을 투자하여 특정한 종목에 탁월한 기량을 보이는 유전자를 가진 선수들을 선발하여 사육하듯이 육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스포츠는 국가 간 자존심을 건 서열 전쟁일 뿐, 축제라고 할 수 없다.

이 지구상에는 서로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인종들의 특성에 따라 운동의 기능도 천차만별이다. 그나마 체중에 따라 체급이 정해져 있는 격투기의 경우는 공정성을 위한 노력이라도 보인다. 하지만 배구, 농구, 수영처럼 신체적 조건이 경기력을 좌우하는 종목의 경우 국가 간의 경쟁은 이솝의 우화와 다를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기계 체조나 마루운동, 피겨 스케이트, 다이빙 등 연기를 통해서 순위를 정하는 종목들은 너무 잔인하다. 인간의 신체로 표현하는 힘과 아름다움에 도전하는 선수들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로지 순위를 정하고 까다로운 기준을 채우기 위한 애처로운 몸짓만이 난무한다. 아름다움과 상관도 없는 과도한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걸고 노동과 다를 바 없는 혹독한 훈련을 수없이 반복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관중과 카메라 앞에서 몇 년간의 훈련 결과를 한두 번의 연기로 평가받는 것이다. 그들은 축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느낀다. 선수들 역시 그들의 노력의 결과를 마음껏 자랑하며 즐기면 모두가 승자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아름다우면 되는 것이고 행복한 것을 추구한다면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기어이 순위를 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올림픽경기는 왜 새벽이나 심야에 이루어지나요?”라는 물음에 웃음을 터뜨린 일이 있다. 인구와 경제력, 신체적 특징과 시차 등 많은 불공정에도 불구하고 메달로 순위를 정하는 것은 강대국들의 자기 과시이며 특정한 인종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거나 상업적인 행위인 것이다. 거북이를 꾀어 달리기 내기를 하자고 한 토끼의 심보와 너무 닮았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우리나라 60만 명에 달하는 수험생들의 대학 입시 절차가 이루어진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꽃은 대학진학이라고 말할 만큼 대학입시의 결과는 단순히 고등학교 생활의 결과만이 아니라 12년 학교생활의 결실로 평가되고 있다. 그 결실의 제일 윗자리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꿈으로 강요된 서울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마치 올림픽의 금메달처럼. 은메달과 동메달의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금메달 한 개의 가치를 능가하지 못하는 스포츠의 메달 순위 방식이 그대로 적용된다. 서울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끝나야 각 고등학교의 입시 성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귀 학교는 올해 서울대학교에 몇 명이 합격했나요?”라는 질문에 합격자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다음의 대화가 지속된다. “서울대학교에는 합격자를 내지 못했지만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는…” 하고 말을 꺼내면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의 성과는 서울대학교와 기타 대학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서울대학교 합격자를 배출하는 고등학교와 그렇지 못한 고등학교로 분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입시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의 각 고등학교 진학실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른다. 마치 평균대에 선 선수가 공중제비를 준비하고 있는 순간의 심정과 같을 것이다. 담임은 학교의 명운이 걸린 이 순간에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합격자 발표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한다. 그리고 학생의 수험번호를 조심스럽게 입력하고는 한동안 감히 엔터키를 누르지 못한다. 선생님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환호성을 울릴 준비는 이미 끝났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 채 엔터키를 눌러버린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라는 말에 환호성이 터지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얼싸안고 풀쩍풀쩍 뛰기도 한다. 마치 내가 교사로 살아온 이유가 이 순간인 것처럼. 하지만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선생님들은 소리 없이 뜨겁고 짧은 한숨과 함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주섬주섬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린다. 담임만이 혹시라도 수험번호를 잘못 입력했나 싶어 두어 번 더 확인하고는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젖힌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이 담임인 자신의 잘못처럼 깊은 죄책감에 빠져든다. 학부형과 교장에게 전화할 용기조차 없다.

입버릇처럼 서울대 중심의 입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로 인해서 입시위주의 교육풍토가 만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서울대학교에 합격자를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학교의 부침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대학입시에서 뜻밖에도 우리학교가 서울대학교 합격자를 2명이나 배출했다. 그 결과 하나만으로도 금년도 우리학교 신입생들의 합격선이 놀라울 만큼 높아졌다. 이토록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한 해 모집 정원이 3100명 정도이다. 산술적인 입시 경쟁률은 200:1이다. 서울대학교 합격은 우월한 학습 유전자와 공부에 몰입하는 능력을 타고난 소수의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울대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수준의 대학이어서가 아니라 입시라는 게임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금메달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의 입시 기준이 많이 변하여 성적 이외의 요소들이 당락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색내기용으로 배치된 몇몇 전형에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우리나라 최상위권 대학들의 입시 기준이 다양화 되었다는 말은 내신과 수능 이외의 또 다른 요소들이 추가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육환경이 열악한 농어촌 학생들에겐 점점 더 버거워지는 조건들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서울대학교 합격자를 낸 학교에 속한다는 것은 학교의 존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학교의 최상위권 학생들은 학교이름을 가슴에 달고 힘겨운 도전을 멈추지 못한다. 자만한 토끼가 어쩌면 잠들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그래도 없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비록 현수막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도 혼신의 노력을 다해 합격한 대학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금메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