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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성 0000 요양원의 그분, 인간다운 삶을 위한 봉사인 카리타스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1995년 늦가을 새벽 5시, 아침 근무를 위해 성 0000 요양원 3층 생활동에 도착했다. 인수인계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벽에 붙은 선반에 얹힌 굵은 초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것은 요양원에서 누군가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야간근무를 한 간호사가 몇 시간 전에 309호실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가셨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털썩 의자에 앉았다. 인수인계 시간 내내 그 할아버지 생각만 났다. 고맙다는 말씀도, 잘 가시라는 인사도 못 드렸는데 어떻게 하지. 망설이다가 흘려버린 기회들이 안타까웠다. 촛불 앞에서 잠시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드렸지만, 드리고 싶은 말은 훨씬 많았다. 그렇다고 마냥 촛불 앞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어르신들을 깨워 드리고 기저귀를 갈아드리며 간단한 세면을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드실 준비를 해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한 방, 한 방,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며 309호실로 갔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분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익숙했던 편안한 미소와 나지막하지만 울림이 있는 인사를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들을 휴게실과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으로 모셔드린 다음, 30분 휴식시간 동안 할아버지께 감사했다는 말씀과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그분을 모셔 둔 지하 안치실로 갔다. 안치실 특유의 서늘한 기운을 뚫고 그분과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그분 삶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나는 두 달 전부터 비엔나교구 카리타스가 운영하는 2년 과정 노인간호조무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본당에서 편찮으신 어르신들을 돕는 사업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도 할 줄 모르는 일에 관해 논문을 쓰는 것이 부끄러워 그 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에서는 한 주간에 이틀은 학교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사흘은 노인 요양원에서 실습을 했다. 그 실습이 참 힘들었다. 신학공부를 위한 독일어만 주로 사용했기에 생활용어와 의학용어가 뒤섞인 요양원의 언어가 낯설고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어르신들 기분과 상태, 그리고 그분들 인생사나 관습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게다가 한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으실 때마다 나를 조롱하고 모욕하셨다.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셨다. 열일곱 분 어르신의 식사를 돕는 일, 목욕과 대소변 수발, 그리고 그분들 마음에 맞는 여가시간을 준비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과 어르신들 치매 때문에 그분들과 대화를 할 수 없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종노릇하는 것 같았다.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은 유혹이 하루하루 커져갔다.

그런 내게 어르신을 수발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를 알려준 분이 그분이었다. 그분은 말기 위암 환자로 통증을 가라앉히는 치료만 받으며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계셨다. 위암 말기의 통증은 상상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를 같이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들었는데, 그분은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그 고통을 감당하고 계셨다. 그 방에 들어서는 누구에게나 그분은 먼저 인사하셨다. 소박한 미소를 머금고 차분한 음성으로 “그뤼쓰 곧(안녕하세요)”이라고 인사하셨다. 옷을 갈아 입혀드려도, 화장실에 모시고 가도 늘 “고마워요!”라고 말해주셨다. 가끔 다른 어르신들을 목욕시켜드리고 땀범벅이 되어 그 방으로 가면 손수건을 조용하게 내밀면서, “땀 닦으라.”라고 하셨다.

아주 드물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당신 통증을 견디다가 누군가가 그 방에 들어서면 밝고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어르신이 애쓰시는 것이 안타까워 “아프시면 소리를 질러도 되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자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데 소리를 지르면 이 처지에서도 나를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잖아. 나도 힘들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고 싶다네.”라고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이 엄청난 거인처럼 보였다. 덮쳐누르는 통증에 맞서서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용사 같았다. 그분 모습을 통해 다른 어르신들도 다시 보게 되었다. 열 살 무렵 다뉴브 강에 홍수가 나서 물에 휩싸여 떠내려 갈 때 조각배를 타고 당신을 구하러 왔던 아버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시는 할머니, 과거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셨지만 지금은 빨간색 옷만 입으려 하시며 하염없이 울고 계신 할머니, 60대 초반에 뇌졸중으로 왼쪽이 마비되어 분노를 폭언이나 폭행으로 터뜨리시는 할아버지, 서로 다른 모습들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당신 인생을 짊어지고 자기다운 삶을 위해 애쓰고 계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 노력이 늘 멋지고 성공적이지는 않으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또 그 다양한 삶은 어떻든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러자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양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사람다운 환경에서 자기다운 삶을 더 쉽고 온전하게 꾸려 가실 수 있도록 돕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그 일을 통해 나 역시 ‘사람다운 삶’, 곧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