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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2월 5일 연중 제5주일 : 마태 5,13-16.

|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신학교 일과 중에 끝기도를 마치고 신학생들은 거룩한 독서를 합니다. 그 시간에 저도 제 나름대로의 복음연구를 하는데, 가끔 장시간 복음만 멍하니 쳐다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딱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단호함과 단정적인 어법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는 소금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단정하십니다. 또 “빛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누구보다 아프고 소외된 사람을 먼저 찾아 나서고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신 예수님께서 너무나 단호하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를 저는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는 역할을 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소금이 자기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녹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바로 그런 소금이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맛나도록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엉망이라고, 살맛이 없다고 불평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가 엉망인 세상을 멋있는 세상으로, 살맛 없는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나는 어떤 소금인가? 내가 있음으로 우리 집이 더욱 아름다운 집이 되어 가는가? 내가 있음으로 우리 집이 살맛나는 집이 되고 내가 있음으로 우리 집이 멋있는 집이 되어 가는가? 아니면 나는 있으나마나 한 그런 사람인가? 내가 있음으로 우리 성당이, 우리 회사가 살맛나고 멋있는 그런 성당, 그런 회사가 되어 가는가? 아니면 우리 가정이, 우리 성당이, 우리 회사가 형편없고 멋이 없다고, 엉망이라고 불평하고 비판만 하고 그 책임과 짐을 다른 이들에게 떠맡기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또 예수님께서는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사물을 밝게 볼 수 있게 하고 따스함을 전하여 다른 생명을 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빛이 없으면 생명이 자라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빛이 자기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태워야 합니다. 태양이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이 자신을 불살라야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바로 그러한 빛이다.” 나는 과연 어떤 빛을 내는 사람인가? 내가 있음으로 우리 집과 성당과 회사가 더욱 밝아지고 더욱 따뜻하게 되었는가? 나는 우리 집과 성당과 회사에 어두운 근심과 차가운 바람만 일으키는 사람은 아닌가? 나는 우리 집과 성당과 회사에 밝은 웃음이 없다고, 따스한 온기가 없다고 그 책임과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며 불평만 하는 사람은 아닌가? 불평하고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소금이 없다고, 빛이 없다고 불평하고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

하지만 부정부패와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소금은 짜야 하고, 빛은 비춰야 합니다. 소금은 짤 때만이, 빛은 세상을 비출 때만이 그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그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작정 힘든 짐만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 마태 5,17-37.

 |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 대구가르멜수도원 원장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은 연중 제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며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계명들을 작은 것 하나까지 철저히 지키도록 명하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라고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사실, 공생활 동안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 파격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을 서슴없이 하셨는가 하면, 세리와 죄인들과 격이 없이 앉아 식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예수님의 모습과 오늘 복음의 가르침에는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의 말씀 이후에 따라오는 여러 가지 예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가늠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살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과 진배없으며, 음욕을 갖고 여인들을 바라보는 게 간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십니다. 또 지키지도 않을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외적으로 보이는 행위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내적인 동기, 내적인 지향의 순수함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대단하고 화려해 보일지라도 하느님 보시기에 별 볼일 없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눈에는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위대한 일들이 있습니다.

중세 때 어느 지체 높은 성주가 있었답니다. 그 성주는 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깊어서 어느 날 대성당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대성당을 지었다는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그 어떤 신하도, 백성도 헌금을 하지 못하도록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가난한 할머니가 돌을 운반하는 말이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렇게 혼자 생각했습니다. ‘이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데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기에 뭔가를 바치면 좋겠다. 이런 큰일을 위해 아무 생각도 없이 수고하고 있는 저 동물들을 내가 도와준다면, 아마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게야.’ 그래서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몇 푼으로 마른 풀 한 단을 사서 말에게 주었습니다. 성당 건축 공사가 끝난 후, 성주가 축성식을 거행할 때가 되자 자신이 이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재물을 기증했음을 오래토록 증명하기 위해 머릿돌에 자기와 자기 가족의 이름을 새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그 이름은 지워지고, 거기에는 무명의 가난한 부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는 화가 나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지만 번번이 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성주는 그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수소문을 해서 데려오도록 명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할머니를 데려오자 성주는 혹시 성당을 짓는 데 무엇을 바친 것이 없는지 캐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무서워서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성주가 거듭 캐묻자 마른 풀 한 단이 기억나서 돈을 내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말이 마른 풀을 조금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성주는 어째서 그 가난한 할머니의 이름이 새겨졌는지 깨달았으며 그 후로는 아무도 감히 그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순수한 사랑으로 한 아주 작고 감춰진 행동이 오히려 하느님 보시기에는 위대한 업적보다 더 가치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을 거울삼아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대하고 일을 함에 있어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땠습니까? 하느님과 교회를 위한 순수한 사랑을 갖고 대했는지 나 자신의 영예를 드높이기 위해 그 일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 마태 5,38-48.

글  | 김창현 베드로 신부, 죽전성당 보좌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수많은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각자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점점 더 복잡해집니다. 누구에게나 자신과 맞는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한편 우리는 부족한 존재이기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처의 자리에서 원수가 생겨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들은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이런 일은 뉴스에서 정말 가끔씩 등장하는 미담 사례 중 하나라고만 생각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면 악인도 선인으로 보인다는 터무니없는 강제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덮어놓고 포기하기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인도의 성자라 불렸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비폭력을 통해서이다. 증오는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증오에 대해 증오로 맞선다면 그것은 증오의 크기와 깊이를 더해 줄 뿐이다.” 아마 예수님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던 광장의 집회가 비폭력을 통해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배우는 산교육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나를 통해 상대방이 얼마나 내가 의도한 만큼 변화될 것인지를 따지려고 한다면 지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가치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느냐를 생각한다면 지치더라도 또 다른 곳에서 힘을 얻습니다. 맞서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동시에 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해지려는 것은 지나친 오만일 수 있습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결점이 없는 완전함이 아니라, 결점을 안고 가는 완전함으로 초대하십니다. 완전함에로 향하는 여정에서 나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고, 원수의 자리는 좁아집니다.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불의에는 정의로, 거짓에는 진실로 살아오셨던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처럼 손해만 보고 사는 것이 답답하지만, 그것은 결코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얻고 이웃을 얻는 것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월 26일 연중 제8주일 : 마태 6,24-34.

| 반 유딧 수녀,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ㄷ)

요즘은, 아니 기억도 되지 않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불경기’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불경기’라는 단어에는 의식주(衣食住)의 경제적 결핍을 초래하는 사회적 원리가 담겨 있어 불경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까운 이들의 고달픔과 어둠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고 어두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라.”(6,19-24)는 전(前)문맥에 이어 “세상 걱정은 하지 말라.”(마태 6,25)는 오늘의 복음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고 하루의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몸의 보호를 위해 무엇을 입을까? 하고 오늘의 의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25절) 우리가 제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양식과 옷, 그 자체가 목숨과 육신보다 더 소중해서가 아니라 옷이 몸을 보호하고 양식이 생명을 이어가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서’ 라는 명분하에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반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자비는 작아지고 무관심으로 빠져드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나 자신과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가장(家長)은 우리 가족, 나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보다 그들에게 주고 싶은 세상 것이 너무 많아 돈을 버는 일에 혼신하며 정작 필요한 것을 잃어 갑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을 이기기 위해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학교와 학원을 누비며 지식은 폭발하고 성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모님과 친구는 잊히고 인성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집안에서 밥상을 마주하고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탁교육을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아니 집안에서 자녀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는 하십니까?

고달픈 하루의 노동을 끝낸 우리에게, 세상사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제적 이권으로 신뢰를 잃고 허탈에 빠져있는 너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32-33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무엇일까? ‘하느님 나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으며 포크대신 젓가락질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고, 아버지를 위하여 자녀가 물을 떠다 드리며 감사를 대신할 줄 아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많은 돈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이며 배려이고, 너를 위해 기꺼이 인내하고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자녀의 결심이며, 우리 가족에게도 필요하지만 이웃을 위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자비입니다.

우리의 가족과 자녀들은 유명 브랜드나 명품을 통해 자존감을 갖고 세상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에서 참다운 인성과 사랑을 배우며, 가족과 이웃이 어떤 존재인가를 배워갑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수룩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참조 1코린토 1,22-30)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과 자연의 질서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봅니다. 하늘을 비상하는 새들, 화려하게 피었다가 아낌없이 지는 들꽃, 여유롭게 강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며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살아보려 했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 하고 약속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뜻에 집착하여 아등바등 살아왔던 시간들, 고집에 사로 잡혔던 짧은 안목을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오늘 고생은 오늘로 충분하다.”(34절)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는 예수님께 오늘은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입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살겠습니다.”(시편 23,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