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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기 ①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1요한 1,5)


글 박태훈 마르티노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8년 전 한티, 그때에 말씀은 쉬웠습니다. 고도의 수련과 연마를 거치지 않고도 말씀은 순수하고 여렸던 제 마음에 살며시 다가와 그대로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씀이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다는 건, 말씀이 철저히 ‘하느님에게 의존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점과 공간에 놓여 있던 사건과 존재를 다룹니다. ‘그때 그곳’과 ‘지금 이곳’이, ‘그 시간의 존재’와 ‘이 시간의 존재’가 같을 수 없지만 말씀은 그때와 지금을, 그곳과 이곳을 하나로 이어주며 살아있게 하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 ‘쉬움과 쉽지 않음’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의 교만함이 말씀을 덮어버렸습니다. 나의 시선, 생각, 감정, 지식, 욕망, 안락함….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져서 성령의 감각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고 던지신 그분의 뼈 있는 질문을 언제부턴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책으로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매일 엇비슷한 강론을 듣고, 추상적인 신앙언어가 범람하는 강의 속에 파묻혀 묻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물음을 던지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skill)을 익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말하고, 하느님 없이 하느님에 대한 글을 쓰고, 하느님 없이 하느님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 버렸습니다.

 

한 달의 영신수련 동안 ‘나’란 존재가 하느님을 덮어 버릴 때 어떠한 것도 밝아질 수 없음을, 그때부터는 ‘어둠’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의 허물을 감추고 빛을 외면해 왔습니다. 세상의 어둠에 아파하고 분노하고 소리쳤지만, 정작 ‘나’의 어둠에는 무감각했기에 세상이 더 어둡게만 보였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 온전히 ‘나’를 비우고 놓아버릴 때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나’를 비우고 또 온전히 ‘나’를 죽이는 과정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기도 했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제 삶의 단면마다 새겨진 온갖 기억들과 인간적인 욕망들이 벌거벗겨진 채 적나라하게 다가와 한없이 부끄러워 외면하며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적막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 주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그래서 사랑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단다.” 이 목소리에 다시 힘을 내 저는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스스로를 비울 수 있었습니다. 8년이란 시간 동안 변함없이 변화하면서도, 변화하면서 변함없는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었음을 다시 찾은 한티에서 비로소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 은총의 시간에 계속 머무르고 싶지만, 이제 다시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지금처럼 하느님 앞에서의 비움과 머무름이 지속될 거라 자신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갖가지 핑계와 외부적인 조건들로 지금의 감동과 깨달음을 시나브로 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잡은 하느님과의 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저는 부단히 스스로를 되묻고 성실하게 말씀을 실천하며 살고자 합니다.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경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기에 ‘거룩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온전히 저를 맡깁니다. ‘주님, 부족하고 나약한 저를 이끄소서. 말씀하신 대로 저를 받으소서. 아멘.’

 

“오늘날 참으로 살아 있는 복음서는 거룩한 이들이 삶으로 보이는 증언입니다. 살이 되신 말씀, 주님을 철저히 뒤따르는 제자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복음단락입니다.” - 엔조비앙키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