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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영성수련기 ②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글 황지현 예로니모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1년간의 대학원 생활 동안 나는 더 나은 내가 되고, 좋은 사제가 되고자 열심히 바쁘게 살았다. 한편 그로 인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늘 긴장된 상태로 지냈으며 너무 많은 일을 하는 나머지 정작 내가 해야 할 일과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지냈다. 지나치게 많은 활동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원함으로 이어졌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 안에 머물며 그분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때문에 이번 영신수련은 정말로 절실한 것이었다.

이번 피정 동안 나는 하느님을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내 존재를 걸고 영신수련에 임하고자 했다. 처음 2주간은 불타는 의욕과 열정으로 읽고 기도했고 야곱과 같이 하느님께 매달려 당신을 보여주십사고 그분과 씨름을 벌였다. 사실 나의 바람은 약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단 한번만이라도 관조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피정 이틀 만에 그러한 은총을 허락해주셨고 이 후로도 종종 당신 현존에 머무는 기쁨을 주셨다. 그렇게 말씀에 악착같이 매달렸던 2주라는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내가 텍스트 주위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이연학 신부님의 표현대로 “거룩한 독서는 자기 수행의 간절함과 투철함에 그 결실이 좌우되는 영성의 방법이나 기술, 기법이기 이전에,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듣는 나 사이의 ‘관계’이며 하느님께서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힘과 노력과 의지와 지성, 열정으로 하느님을 내 방식대로 알아듣고 소유하고 쟁취하려 했다.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지만, 나는 말씀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말씀을 듣기보다 내 생각과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결과들을 내어놓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내 목소리가 커지고 내 의지만 강한 그곳에서 하느님이 계실 곳은 없었고 그분은 침묵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한계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동반 신부님의 조언은 간단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힘을 빼라는 것,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 보다는 말씀이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토록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새 하느님 말씀을 얻어내고 작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을 성령의 이끄심에 맡긴다고 기도드리면서도 내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힘을 빼고 그분께 의탁한다는 것,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그토록 애쓰는데 이 노력을 그만 둔다는 것, 남들보다 가진 것도 없는 나인데 얼마 되지도 않는 것마저 내어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다. 이것마저 내려놓는다면 내게 남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데 이를 내려놓고 그만둔다는 것은 나의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었다. 내 삶의 원동력이자 버팀목과도 같은 것을 어떻게 내려놓는다는 말인가?

결국 나를 죽여야만 내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계시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전적인 주도권과 자유를 앞세워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내 뜻대로 이끌어나가려는 나의 ‘거짓자아’와 직면해서 맞서고 도전해야 했다. 이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때만 참된 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참 자아, 즉 하느님의 모상인 원래의 내 모습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얽매고 있는 거짓자아의 상태에 머무르던지 예수님을 따르고 참 자아를 회복하던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나를 내려놓고 비우는 것을 힘들어 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나를 믿고 너를 내려놓으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얘야. 내가 너를 불렀고 지금까지 너를 이끌어오지 않았니? 지금까지 너의 노력으로 이만큼 왔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 네가 너를 비우기만 한다면 나는 너를 내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마. 네가 그토록 바라던 참된 너의 모습과 좋은 사제가 되고자 하는 바람대로 너를 이끌어주겠다. 너는 힘만 빼거라. 너를 사랑하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렇지만 주님, 어떻게 제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나요?’, ‘이제 내가 자신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을 보여주겠다. 나에게 와서 배워라.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편하단다.’

 

그렇게 사순 복음 묵상이 시작되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처음 2주가 하느님과의 씨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죽을힘을 다해 움켜잡은 하느님의 옷자락을 놓아야 하지만 놓지 못하는 나와의 지루한 씨름이었다. 더 이상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았고 본문 필사도 모조리 멈추었다. 생각, 판단, 상상, 내가 가진 틀과 계획, 의지, 노력, 지식 등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저 성체 앞에서 성경을 들고 읽었다. 그리고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서 즉시 읽기를 멈추고 머물렀다. 머무름에서 내 생각과 의지가 개입되려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다시 읽었다. 그렇게 읽고 머무르고 되새김했다. 모든 것을 비울 때, 내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듣고자 할 때 비로소 말씀이 나를 찾아오셨다. 더 이상 본문을 이해하고자 분석하고 지식들을 동원하지 않아도 구절 하나하나가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예전의 묵상과 기도에 비해 말도 줄었고 지적쾌감이나 자기만족감, 감정의 역동도 없었지만 잔잔하고 고요한 침묵 가운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있었다.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 듣기만을 원하고 그분 사랑만을 바랄 때 그분이 말씀하셨고, 내가 그토록 애를 쓰고 노력해도 채울 수 없었던 나를 당신 말씀으로 가득히 채워주셨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기를 멈추고 침묵하는 그 순간 그분 말씀은 살아계셨다. 비로소 말씀이 내 마음에 오셨다.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피정을 마칠 무렵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의 베드로처럼 이 산에 초막 셋을 지어 머무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머무르고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산 위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독서의 본질은 결국 성경 읽기가 아닌 성경 살기다.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이 되기 위해 쓰여진 성경을 읽는다. 내 삶은 쓰여지지 않은 또 하나의 성경이 되어야 한다. 영신수련에서 느끼고 체험한 하느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매일매일 말씀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이 길을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