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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4)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함석 동이: 8월11일

오후 1시경,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마치 아프리칸처럼 마을 산책을 했다. 사실 이들은 한낮의 더위엔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경우가 많다. 도심의 복잡하고 정겨운 풍경들 중 신작로 모퉁이에 옹기종기 앉아 낡은 함석지붕이나 재활용 철판을 두들기며 뭔가 열심히 만드는 이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동이를 만들고 있었다. 망치질로 구겨진 철판을 펴고 구멍 난 곳을 때우며 마름질도 깔끔히 해내며 노련한 손놀림으로 물동이를 만들었다. 다가가 말을 걸어 보니 18~2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친구가 사장이고 다른 세 명의 동생들(친지라고 했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돈을 많이 버냐?”고 했더니 “좀 번다.”고 답을 했다. 한 달에 얼마쯤 버냐고 물었더니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듣는 사람이 많아 말하지 않은 듯 했다.) 세 명의 사촌들에게는 하루에 2,000세파프랑을 준다고 살짝 귀띔한다. 마침 물동이가 필요해서 15리터들이 물동이 하나(그는 2,000세파프랑이라 하고 사촌 동생은 1,500세파프랑이라 했다. 외국인에게는 조금 더 받는 게 이곳의 관례다.)를 주문하고 잠시 앉아서 구경했다.

 

한편 한쪽 편에 쌓아둔 폐 함석 조각들을 어린 아이들이 부대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이 뭐하냐고 물으니 이들이 내다 팔고 돈을 갖다 주면 다시 그들에게 조금 준다고 했다. 재활용 함석 조각으로 물동이를 만들고 또 그 조각들을 내다 팔아 돈을 번다. 한 친구가 벌써 예닐곱 명을 고용하고 있는 셈이다. 일꾼들은 많은데 일거리가 턱없이 적은 나라, 이들 속에서 열심히 사는 젊은 사장 친구를 보며 그래도 이 나라는 미래가 밝다고 말하고 싶다. 근데 어린 아이들이 날카로운 함석 조각을 맨손으로 부대에 담는 모습이 사뭇 아리다.

 

요란한 기도: 8월 13일

간밤에 요란한 찬양과 묵주기도를 들었다. 성당에서 들려왔는데 로사리오는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의 결의에 찬 함성 같았다. “좀 살살하지.” 침상에서 따라하다가 살짝 짜증도 내며 밤새 뒤척였다.

 새벽(여긴 아침) 5시 50분, 미사를 위해 사제관에서 성당으로 나갔더니 주변 마당에 온통 십자가가 그어져 있었다. 찬양과 요란한 묵주기도를 했던 전사들의 흔적임에 틀림없었다. 자세히 보니 십자가 중간에 촛농이 있었다. 소금으로 십자가를 그어 놓고 그 가운데에 촛불을 켜고 밤새 각자의 간절함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나는 살짝 짜증내며 침상에 있었는데…. 누군가는 잠도 자지 않고 성당에서 사제관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앞에다 큼지막한 십자가를 그어 놓고 기도했다. ‘사제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을까? 악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했을까?’ 아니 감사함으로 축복을 청하며 사제들을 위해 기도했음에 틀림없을 것 같은데 갑자기 지난밤의 뒤척임과 짜증이 부끄러움으로 되돌아온다. 언제부턴가 아이의 순수함과 젊음의 열정과 부모의 간절함이 무뎌져 자리 잡았다. 나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단 한 번이라도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밤새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었더냐?”

 

쓰나? 아끼나?: 8월 14일

여기 와서 좀 헛갈리는 것이 있다. 워낙 없이 살다보니 있을 때 쓰자(먹자, 즐기자)는 성향이 강한 것 같다. 먹거리가 있을 때 잔뜩 먹는다. 떨어지면 우리로 치면 밥과 김치(고조, 까사)만 먹고 지낸다.(버티는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잘 쓴다. 월급이 2~4만세파프랑 정도인 사람들이 650세파프랑하는 맥주를 잘 마신다.(안주 없이 술만 파는 집이 골목 구석구석에 있다.) 전기도 하루 8시간, 3일간 순환하며 들어오니까 잘 끄지 않는다. 선풍기도 스위치를 켜 놓고는 기다리다가 일단 들어오면 사람이 없어도 끌 생각을 안 한다. 전기 들어오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으니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하긴 진짜 가난한 사람들은 선풍기도 없이, 맥주도 마시지 못하고 하루 한 끼에 족하며 산다. ‘있을 때 아끼면 필요할 때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은 어쩌면 여유를 즐기는 이의 배부른 연민인지 모르겠다.

 고민이 하나 있다. 전기 있는 낮에 선풍기를 계속 틀어야 할까? 없을 때 덜 아쉽도록 참을만 하면 안 쓰는 것이 좋을까? 나 또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절약(옹졸함)과 낭비(선용)의 선상을 오가며 이랬다저랬다 한다. 이건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요즘 방에 스위치를 켜 놓을 때가 많다. 외출 할 때도 그냥 켜 놓고 나가기도 한다. 난 여기서 엄청 부자다. 아껴서 부자인지 많이 벌어 부자인지 태생이 부자인지 모르겠다. 저축은 하늘에만 하는 것인가? 땅에서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헛갈린다. 모르겠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난다. 하늘나라는 저축도 절약도 낭비도 없겠지.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세상을 산다는 건… 아껴야 하나? 나눠야 하나? 힘내 벌어야 하나?

 

자녀봉헌: 8월 17일

자녀를 많이 낳는 이곳에선 거의 매주 2~3명의 자녀봉헌식이 있다. 낙태와 피임이 거의 없으니 많이 낳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곳에서 출산(다산)은 큰 축복이다. 예물봉헌이 끝나면 봉헌식이 시작된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나오면 그 뒤에 아빠가 서고 또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감사예물(계란 한 판, 생수 1병, 닭 1마리 등)을 들고 선다. 사제는 감사와 축복의 기도를 드리고 나서 부모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아 제단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높이 들고는 부모와 함께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고는 아이와 부모의 이마에 축복의 십자가를 그어준다.

가끔 중학교 1~2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엄마도 있다. 아빠는 그보다 1~2살 많아 보인다. 분명 학생인데… 여기선 축복받는 일이다. 결혼 전, 그것도 학생인데 아이를 낳은 부끄러움보다 자녀와 함께하는 부모의 기쁨이 더 큰 것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결코 이들을 손가락질하지 않고 축복한다. 이른 출산으로 학업을 중단하기도 하지만 간혹 자녀를 안고 학교에 오기도 한다. 언젠가 이곳도 개발과 자기성취, 다변화될 사회 안에서 조금씩 저출산으로 변하겠지만, 가난하지만 대가족의 어울림이 있는 이 사람들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결코!

 

탈 것: 8월 21일

오토바이 택시가 있다. 4명까지 탈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타는 사람들 숫자만큼 나눠 낸다. 4명이 타면 기본거리에 한 사람당 150세파프랑이다. 거리에 다니는 대부분의 오토바이 택시엔 3~4명이 타고 다닌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작은 오토바이에 5명(운전자 포함)이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면 위험해 보이기도 하지만 정겨워 보인다. 승합차 버스도 있다. 시내버스처럼 정해진 구간을 다니는데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수시로 고장 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 시내구간에 한 사람당 150세파프랑인데 12인승 승합차에 20명 정도는 기본으로 탄다. 인원 제한은 탈 수 있는 만큼이다.

택시도 많다.(정확한 표현은 일정구간을 오가는 택시버스다.) 20~30년 이상 운행된 노후 된 차량이지만 내부는 깨끗하게 관리한다. 택시는 콜을 하면 기본거리에 1,500세파프랑이다. 마찬가지로 타는 숫자만큼 나눠 낼 수 있다. 운전자를 제외하고 6명까지 탈 수 있다. 시내 일정구간(대로에서 직진만 하는)을 오가는 택시에 끼어타면 한 사람당 150세파프랑이다. 몇 번 타 봤는데 친절한 반면 에어컨은 한 번도 틀어주지 않았다. 참고로 기름 값은 한국보다 10~20% 더 비싸다. 재미있는 것은 만차인 택시를 세울 수 있다. 운전기사와 흥정해서 타고 있는 사람들의 요금보다 조금 더 주면 모든 사람들을 내리게 하고 탈 수 있다. 근데 이 정도 되면 한국에선 거의 전쟁인데 먼저 탄 사람들은 대부분 기쁘게 내린다. 왜냐하면 타고 온 거리만큼 공짜로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탈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걸어 다닌다. 우리 집 경비원도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닌다. 25,000세파프랑(이곳의 기본임금인데 특별한 기술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받는다.)의 월급으로 매일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다. 가난한 나라지만 내가 있는 곳은 수도이기 때문에 물가가 높다. 더군다나 오랜 전쟁으로 생활 경제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UN군과 많은 NGO 단체들이 들어와서 표면적으로는 경기가 활성화되는 듯한데 열매는 고위 공무원들과 일부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듯하다.(뇌물과 특혜)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물가는 2~3배 올랐는데 월급은 거의 오르지 않으니 전쟁의 아픔을 사는 이들의 애환은 사뭇 무겁고 힘겹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세례식: 8월 22일

251명이 세례를 받았다. 최근 몇 년간 전쟁을 겪어서 세례자가 좀 더 늘었다 한다. 다들 멋지고 예쁘게 차려입고 오후 2시 한증막 같은 성당에서 세례식을 거행했다. 사실은 발전기에 문제가 있어서 2시 예식을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 이곳은 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대부모가 세례자들의 뒤에 서서 각자 선물로 준비한 성물을 축복받는 예식이 있었다. 묵주와 성경, 십자가 등을 사제와 함께 손에 들고 축복 받고는 그 자리에서 세례자들의 목에 걸어주고 손에 끼워주며 축하의 인사를 했다. 소금예식도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라며 촛불을 건네주는 빛의 예식만 있지만 이곳은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의미로 입에다가 소금을 넣어주는 예식도 같이 했다. 처음이라 나는 조금만 넣었는데 옆을 살짝 보니 다른 2명의 사제는 듬뿍 넣는 것 같았다. 엄청 짤 텐데…. 세례식도 표주박으로 듬뿍 3번씩 얼굴전체를 적셔줬다. 나는 한국에서처럼 살짝 적셨는데 더웠지만 모두가 너무 행복한 세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