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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단상
하느님 나라 2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너희 나라 교회는 어때?”, “뭐…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이….” 저는 잠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두서없이 말하기보단 정연한 자랑이 되기 위해서 급하게 머리를 굴리느라 말을 머뭇거렸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요…” 이어지는 말들은 꽤나 길었고 길어서 허둥대며 끝이 났습니다. 마무리는 이러했습니다. “그래도, 프랑스 교회와 비교도 안 될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라 아직 신앙의 깊이는 얕은 것 같아요.” 미소 띤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던 프랑스 리옹교구 성소담당 신부님은 갑자기 자세를 달리 하시더니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인데, 한국 교회의 신앙에 대해 평가하니? 넌 그럴 권한이 없어.”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대개 하느님의 뜻을 세상과 다른 곳에서 가능한, 고결하고 거룩하여 어지러운 세상과는 차별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 속에서 형성된 윤리 도덕적 기준이나 관습적 잣대를 준거로 하느님의 뜻을 설명하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신자라면 공손하고 인자하고 예의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생활양식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 말입니다. 세상과 차별적인 것을 추구하되 세상이 만든 정연한 준거와 규칙들을 따라 사는 것, 그래서 세상 안에서 ‘칭찬’ 듣는 것을 신자의 품위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몇 가지 질문들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그토록 당연시되었던 안식일을 어기고, 죄인과 어울려 먹고 마셨을까?”, “예수님은 왜 당시 사회의 윤리와 관습의 준거집단인 사두가이, 바리사이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셨을까?”

하느님의 뜻이 육화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삶이, 그 규칙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다시금 되돌아보는 데 소용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그렇다’, ‘모두가 맞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라는 논리는 합리적인듯 하나 때론 얼마간의 포기와 타협을 전제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외치신 건 포기와 타협으로 점철된 세상의 주류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 생각이, 제 판단이, 제 가치관이 옳다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외치고 이 세상에 저항하신 이유는 ‘조화’에 있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구별되어 질서정연한 세상을 원하셨지요. 빛이 생겨 어둠과의 조화를 이루어 창조의 하루가 완성되었습니다.(창세 1,5) 하루의 완성은 이틀, 사흘째 날로 이어져 공간의 구별을 만들어내고 각 공간마다 고유한 생명체들이 제 종류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창세 1,25)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생명체들은 저마다 가진 제 색깔을 뽐내며 ‘다름의 향연’을 펼치는 게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본디 모습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성서학자 뽈보샹은 창조의 마지막 날, 곧 이렛날을 가리켜 ‘하느님 절제의 시간’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이렛날에 빗대어 묘사하고자 한 것은 유다 사회의 안식일인데, 히브리말로 ‘싸밧( )’이라고 합니다. 흔히 안식일이라 하면 ‘쉼’을 떠올릴 텐데, 사전적 의미는 ‘중지’입니다. 일을 잠시 멈추신 하느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들의 조화를 감상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 멈추시는 건, 우리 역시 멈추고 주위를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신명 5,14-15) 내가 쉬어야 너도 쉬고, 서로가 쉬면서 서로의 다름이 얽히고설킨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는 사회 분위기가 읽힙니다. OECD 회원국들 중에 한국의 노동시간이 멕시코 다음으로 많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는 바쁘게 움직이고 쉼없이 내달리며 끝없이 경쟁해야 살아남는다는 다소 씁쓸한 현실을 경험칙으로 감내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라 일컫는 경쟁 체제는 경쟁력이 없는 사람을 ‘게으른 사람’, ‘실패한 사람’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사회 하층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속내를 찬찬히 살펴보면 부끄럽게 고백해야 할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지요.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은 윤리 도덕적인 혹은 율법적인 일탈을 꾸짖고 반듯하고 성숙한 사회구성원의 품위를 회복시키자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빴던, 도무지 멈추고 사색하거나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갈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그래서 안식일조차 지킬 수 없었던 소시민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사회적 주류로부터 소외되어 사회적 권리조차 박탈된 이들, 목자, 어부, 소작농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도 사람이고, 사람다워야 하고,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당신의 가르침과 치유로 설파하셨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은 그 어떤 자리든, 어떤 생명체든 제 종류대로 그 가치의 고귀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태초의 하느님 뜻을 다시 일깨우신 것이지요.

하느님이 남자인 아담을 두고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여자인 하와를 만들어 내실 때, 그 둘의 관계를 ‘알맞은 협력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창세 2,18) 히브리말로 ‘알맞다’는 것은 ‘네게드( )’라 합니다. 알맞게 돕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알맞다’의 의미를 두고 눈높이를 맞춘, 그래서 서로가 뜻을 같이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알맞다’는 히브리말 ‘네게드’는 ‘~~ 앞에’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내 앞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있는 게 아니라 너도 있으니 서로 다름을 보듬어야 한다는 게 ‘알맞은’ 것입니다. 하와가 만들어질 때 아담은 깊은 잠에 빠졌지요.(창세 2,21) 하와와 한 몸이 되어 하와에 대해서, 그녀의 다름에 대해서 전혀 알길 없다는 사실이 깊은 잠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모릅니다.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모르는 게 있고, 모르기에 서로 알아가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 노력이 행여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재단되거나 설계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정의롭고 선하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린 민감해야 합니다. 예전 유학 시절 리옹교구의 성소담당 신부님 말씀은 여전히 제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네가 무엇인데, 한국 교회의 신앙에 대해 평가하니? 넌 그럴 권한이 없어.” 일상을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비교와 판단으로 이웃을 재단하는 버릇이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뜻을 훼손하고 있다는 반성이 꽤나 무겁게 다가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서 당신의 용서를 구하고, 당신의 자비 안에 의탁할 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겸허함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