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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유혹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톨스토이의 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주인공 천사 미하일이 속죄의 대가로 ‘인간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으로 강등되어 벌거숭이 몸으로 인간 세상으로 쫓겨 내려오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모두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일생을 통하여 이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다. 내가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살짝 실망했던 것처럼 그 해답은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거나 짐작 가는 평범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진실은 결코 난해하거나 생소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여 가볍게 여기기 쉬운 것들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자신을 구해준 가난한 노부부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미하일이 두 번째 질문의 답변을 찾게 되는 과정도 그리 놀랍거나 충격적이지는 않다. 대충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미하일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구두를 만드는 작은 가게의 직원으로 채용되고 그의 기술력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하루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화려한 마차를 탄 지체 높은 분이 최고급 가죽을 내어 보이며 몇 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지 않는 부츠를 주문한다. 흔쾌히 주문을 받은 미하일은 혼비백산한 주인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가죽을 잘라 슬리퍼를 만든다.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지체 높으신 분의 시중을 들던 사람이 다급하게 되돌아와서 주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하며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슬리퍼를 만들어 달라며 주문을 변경하는 것을 보고 미하일은 빙그레 웃는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 현명하다고 뻐기며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죽음의 시점에 대하여 아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는 않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미하일의 눈에 그 귀족의 행동과 판단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한치 앞 미래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우리지만 부질없는 많은 유혹에 너무도 취약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대 교구장인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는 조선의 선교를 자청하면서 교황님께 보내는 편지에서 쓴 글귀가 나의 방안 낡은 화이트보드의 귀퉁이에 삐뚤삐뚤 씌어져 있다. ‘영원히 머무를 것처럼 그러나 곧 떠날 것처럼.’

 

시대가 변하여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었다고들 한다. 그 말은 80세 이상까지 살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뿐이다. 사람 개개인의 수명은 반복해서 여러 번의 실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통계로 추측할 뿐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허락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허용되어 있지 않다. 통계적 수치에 의하면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내 또래 중에는 절반이 사망한다는 것이고 내가 사망자에 포함될지 아니면 생존자에 포함될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 내가 죽음을 맞이할 확률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내일 보자.’라는 인사도 내일까지 두 사람이 생존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일 뿐 실현을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이다. 우리에게 미래는 ‘확신’이 아니라 ‘기대’인 것이다. 그 기대와 가능성이 현실로 주어진 ‘지금’은 축복이며 ‘내일’은 소망하면서 살아갈 뿐 우리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9년이라는 짧지 않는 시간 동안 미로와 같은 길들을 용케도 잘 지나왔다. 나는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가 눈앞이다. ‘천지 만물의 이치를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가 되었다.’는 나이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자님처럼 현인에게는 가능한 일이었을 뿐 나는 여전히 어리석음의 한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다. 그냥 글자 그대로 ‘귀가 순해져야 한다.’고 받아들이고 싶다. 조금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듣기’가 중요한 대화임을 실천하고 싶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나의 주장을 길게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내려놓기 위해 매일매일 결심해야 할 나이라고 여기고 싶다.

 

세월은 언제나 마음보다 먼저 간다.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지나온 시간을 곱씹어 보게 된다. 낯가림이 심한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되짚어 보면서 혼자 웃었다. 10대에는 힘이 세거나 공부를 잘 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부모가 있거나 이런 친구들과 가까이 하고 싶어 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대가 되면서 생각이나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 했다. 그 시절에 나는 세례를 받았고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과 친해져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같이 부대끼며 살아 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난 연말 그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장거리 출장으로 참석이 어렵다던 친구가 자정이 넘은 시간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몇십 만 원의 교통비를 들여서 달려왔다.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었단다. 그동안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변하지 않고 곁을 지키는 친구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같은 가치관을 나누었던 고교시절 그 친구들이다. 그리고 30대, 40대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나의 생각과 고집이 굳어지면서 이기적으로 변해 갔던 것 같다. 사람을 평가하고 내가 가까이 할 사람을 고르는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사람과 가까이 한다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관점으로 사람을 대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하고 술도 같이 먹고 식사도 같이하면서도 몸으로 가까이 했지만 헤어지면 쉽게 잊어버리는 관계를 벗어나지도 못한 것 같다. 그리고 50을 넘기면서 나는 내가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만만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들보다 조금은 우월하고 싶어 하는 교만함을 품고 사람을 대하기 시작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는 충고하거나 정리하려고 하고 지적하거나 결론을 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쉽게 교정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교장이라는 신분이 씌어지면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라는 색깔이 더욱 진하게 배어들어 나의 태도가 변해 있었다.

‘처음처럼’이라는 말보다 ‘처음보다 더욱 좋게’ 살아보겠다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겸손하고 친구 같고 동료 같은 관리자가 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에 권위적이고 독선적이고 가까이 하기엔 쉽지 않는 고집스러운 관리자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교장이 되면 달라지는 점들 중에 ‘독방을 쓴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모임에서 옆자리는 비어 있다는 것’, ‘아무에게나 반말을 한다는 것’, ‘식사 후에 계산 잘 안 한다.’ 등의 말들은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뻔뻔해진 것 같다. 교장이 된 후 혹시 모임에 늦거나 중간에 나갈 일이 있어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공사다망한 자리를 핑계로 미안함에 둔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매너모드나 전원을 꺼 달라는 부탁도 잘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도 큰 소리로 통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교장이 긴급한 전화를 받을 일은 많지 않다. 출장처리하고 대리 결재일을 지정하고 주요한 것은 미리 짚어두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담임들처럼 일일이 학생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예측 가능한 것이다. 또 강연이나 교육에 몰입하지 못한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평가하고 비평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강의의 내용보다는 강사의 이력이나 지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태도의 이면에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교만함이 자리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교육현장이 변했다고들 하지만 학교 안의 교직원들은 교장 앞에서는 을의 위치에 있다. 학교 안에서 많은 재량권을 가진 교장을 교사들이 함부로 대하기는 쉽지 않다. 용기를 내어 직언을 하기도 하고 술을 핑계로 마음에 담은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그리고 일과 관련하여 학교를 드나드는 여러 사람들과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하는 교장은 어느 순간에 권위적으로 변한다. 내 말 한마디에 당신에게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암시를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인사를 할 때 몸을 숙이는 각도며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는 자세, 그리고 말투와 눈빛 등 어느 순간에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권위의식이 스며들어 있다. 후배 교사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기도 하고, 그들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외면해 버리기도 한다. 내 앞에서는 속마음을 감추며 같이 웃어주고 아무것도 아닌듯한 표정과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에 나의 실수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돌아서면 그들의 나이였던 시절에 내가 했던 그런 비난과 결심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은 ‘교만함’이다. 어린아이에게 몸을 굽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급 의전용 차량을 사양하고 소형차를 이용한 교황님의 모습이 새삼 위대해 보인다.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는 잠언 16장 18절의 말씀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