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일상 속 영화 이야기
'봄날은 간다'


글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계절에 관한 영화들은 늘 그 계절이 되면 우리 기억 속에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관객들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평범하지 않게 이끌어냈던 감독은 두 번째 작품 ‘봄날은 간다’에서도 놀랍고도 매력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음향기술자 ‘상우’(유지태)는 방송국 프로듀서 ‘은수’(이영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프러포즈의 신호를 보내는 상우에게 이별 통보를 한다. 연애와 이별의 경험이 없던 상우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은 채 자신을 피하는 은수의 태도에 당황하고 급기야 이별을 통보하는 은수에게 매달리게 된다. 특별한 것 하나 없이 너무나 평범하지만 우리 삶 속에 이별을 대했을 때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늘 우리 삶 안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대사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물음을 은수에게 던지며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우는 은수 주변을 유치한 집착으로 서성인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 날, 그리스도교가 국교인 나라들에서는 ‘카니발 축제’를 지내며 이별 앞에서 느끼는 집착과 아쉬움을 풀어내려고 한다. 40일 동안 우리가 요구받는 것은 ‘이별’이다. 하느님 이외에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들로부터의 이별, 나를 지탱시켜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가치에 파묻히게 하는 것들로부터의 이별. 이러한 것들과의 이별 없이는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가질 수 없기에 우리는 매년 짧지 않은 이별의 시간을 반복한다. 일정하게 수많은 반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 시간은 여전히 처음 보내는 듯 어렵다. 그것은 ‘상실’이기 때문이다. 이별은 상실이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위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고 그 절망이 우리를 긴 시간 동안 방치할 때 시간마저 약이 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별이 주는 상실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성경은 많은 이야기들로 이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해준다. 소돔을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몸으로는 떠나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이별하지 못했던 사라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으로 변해버린 이야기(창세기 19장)는 이별에 잘 대처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삶도 생명을 잃고 성장을 멈춰 버린다는 것을 전해준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마태오 19,16-26)는 실제로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그것을 놓지 못해 유치한 모습을 불사하고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 중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한 은수와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이별하는, 아니 이별해내는 상우의 모습은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하나의 점으로 끌어당긴다. 은수는 화분을 상우에게 주는 것으로 다시 만날 것을 제안하며 상우의 기억 안에 자신을 붙잡아 두려 한다. 화분을 받아들고 몇 걸음 가다가 멈추고 망설이다 다시 은수에게 돌아가 그것을 돌려주는 상우, 그의 망설임 속에서 느껴지는 이별의 무거운 중력은 관객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어쩔 수 없이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해내는 상우는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삶에 관한 깊은 성찰과 철학을 보여준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드러나지만 ‘봄날은 간다’에서 전달되는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철학’이다. ‘한석규, 심은하, 유지태, 이영애’ 같은 최고의 스타들이 나오지만 영화들 안에서 그들의 스타성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당시 배우들의 브랜드네임에 이끌려 감성의 대리만족을 위한 로맨틱 코미디나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에 감정적 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이 영화들을 보았던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적 에피소드의 잔잔한 전개에 당황해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감독은 일상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이별의 경험들을 과대포장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로 이끌어낸다.

십수 년 전, 본당 사무장님과 수녀님을 모시고 봉성체를 갔다가 돌아올 때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길을 지나가게 되었다. 탄성과 박수로 응답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던 수녀님은 당신과 달리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처연하고 서러운 감정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무장님과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셨다. 두 남자에게는 찬란한 봄볕 아래 흩날리는 벚꽃에서 아름다움보다 이별의 서러움이 먼저 보였다. 어쩌면 떨어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이별의 서러움을 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벚꽃의 아름다움은 그 서러움에서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벚꽃 찬란한 시간은 늘 우리에게 이별을 요구하는 사순시기이다. 그러나 사순시기가 그 자체가 아닌 새롭고 진정한 부활의 생명 안에서 의미를 지니듯 하느님 이외에 나를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들과의 이별은 진정한 나와 참된 삶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있다. 그것은 나를 지탱시켜주는 것들 또한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에 이별이 감당하기 힘든 서러움을 준다 해도 우리는 결국 해내야만 한다. 이별을 해낸 후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밭의 소리를 녹음하는 주인공 ‘상우’의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을 흐트리는 것들에 눈을 감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진정한 삶, 부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언제였나 그대와 이 길을 걸었던 날 ... 꽃처럼 웃었던가 사랑한 아스라한 기억들 ... 언제였나 그리워 헤매던 나날들 ... 분명 난 울었던가 세월에 사라져간 얘기들 ... 나 참 먼 길을 아득하게 헤맨 듯 해 ... 얼마나 멀리 간 걸까 ... 그 해 봄에 ... 아파하던 마음에 따스한 햇살이 ... 힘겹게 돌아오니 어느새 ... 봄이 가고 있네요 - ‘그해 봄에’(노래: 유지태, ‘봄날은 간다’ OST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