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5)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여지없는 축제: 8월 24일

즐기지 못하는 오늘을/내일로 위안하는 우리들//

부족과 불편을 끌어안고/열악함을 충분히 품으며//

주저없이 내던지는 축제가/못내 불평하는 나를 채찍한다.

크게 희망하다 놓쳐버린/너무 열심하다 잃어버린//

쭈뼛쭈뼛 망설이다 지나버린/궁색한 주저함으로 누리지 못한//지금 이대로의 행복을 어이 할거나.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고/내일만 꿈꾸다 지치지마라고//

힘겨움이 사뭇 즐거움 되게/막연한 내일이 춤추는 오늘이게//여지없는 축제를 시작하라 손 내민다.

 

흔적: 8월 27일

머리카락을 잘랐다. 덥기도 하고 잘 빠져서 바리캉으로 잘라버렸다. 생각보단 봐줄만하고 훨씬 시원하다. 침상과 방 이곳저곳에 긴 머리카락이 뒹굴어 대청소를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다. 자기들과 비슷해서 좋다면서 다른 머릿결(1cm 정도 남겨뒀는데 밤톨머리가 되었다)에 신기해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머리감기가 참 편해졌다. 그런데 방 이곳저곳에 남아있는 머리카락들이 지난 나를 드러내고 있다. 탁자 위, 세숫대야 밑, 책 사이…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았던가 싶기도 하고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들었다. 흔적은 지우는 것이 아니다. 잊히기를 기다릴 뿐…. 이젠 짧은 머리카락밖에 없는데 이곳저곳에 남아 지난 나를 드러내는 긴 머리카락을 보며 누군가에게 남아 있을 나의 흔적을 생각한다. 상처를 주고도 나에게선 잊힌 것들이 얼마나 힘들게 할런지…. 그에게 희망한다. 누군가로부터 받은(받을) 더 큰 사랑으로 그것을 잊어버리기를…. 언젠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롭게 넉넉하게 품을 수 있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게 한 나의 흔적을 내가 다 지울 수 없기에 기도 흔적이라도 좀 남겨야겠다.

 

초대와 착각: 8월 30일

교리교사들(17명)의 행사에 초대되었다. 올해 251명의 세례자들을 봉헌(교육)한 이들, 성당에서 적지 않은 공덕을 세운 이들이다. 편지봉투에 나의 이름을 적고 행사내용을 동봉해서 초대했다. 8월 30일 오후 1시, 당연히 점심이 준비될 것이라 생각하고 먹지 않고 기다렸다. 5분 전에 행사장소를 확인하고 2분 정도 늦게 갔더니 서너 사람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곳에서는 30분 정도 늦는 건 다반사이다. 평일미사는 보통 5분 정도 늦게 시작하고 주일미사 전에 비가 오면 30분 정도 늦게 시작한다. 물리적인 정확한 시간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적응해야 할 문화인 셈. 오후 1시에 행사 시작이니 ‘밥을 먹겠구나.’ 했던 나의 생각은 빗나갔다. 음식은 아무것도 차려진 것이 없었다.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그 사이 나는 사제관에 차려진 점심을 얼른 먹고 잔치에 참석했다. 각자 소개를 하고 세례자들을 잘 교육시킨 것에 대해 본당신부님이 치하를 하고….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 음식이 차려졌다. 이게 점심이야? 저녁이야? 부른 배를 누르고 또 먹었다. 하루 세끼를 먹는 부자인 나는 당연히 점심을 오후 1시 전후로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한 끼만 먹는 사람들에겐 먹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해가 있을 때 돈이 있으면, 시간과 상관없이 음식을 먹는 이들 속에서 나는 규칙적으로 하루 세끼를 먹으며 이들과 함께 산다고…. 이렇게 같이 산다고 말하고 있다.

 

첫 미사: 9월 3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잘 하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했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잘 한다는 것 또한 욕심이고 내려놓아야 할 것인지 모른다. 하다보면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열심과 정성을 보태면 사는 세월만큼 익숙해지고 성숙해지리라. 선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야 하는 것, 주어지는 것, 하기를 바라는 것들,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 이런 것들에 몸을 맡기면 되리라. 열매를 따겠다는 것은 금물이다. 보겠다는 것 또한 욕심이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역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열매를 맺으시지도 않고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8)

그저 나는 살 뿐이다. 심는 것도 거두는 것도 내 것이 아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십니다. 어버버~ 음….” 이런 상고어 미사일지라도 시작했음이 기쁜 일이다. 아직은 앵무새와 별 다를 바 없으나 마음과 정성이 함께하면 잘 되겠지. 새로운 언어로 미사를 드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보다 새로운 언어로 마음과 대화하는 일은 엄청 더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는 되겠지.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누군가 이렇게 말했지. “우리 모두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안에서 오늘도 나는 내 길을 간다. 그저 놀면서….

 

그 아버지의 그 아들: 9월 9일

20년간 휴무 없이 야간경비를 한 사람이 아파서 한 달을 쉬게 되었다. 일 년에 며칠, 많이 아픈 날 쉬기는 했다지만 어찌 20년을 휴무 없이 일할 수 있는가? 무쇠철인이라 생각했다. 그의 빈자리(한 달)에 26살 젊은이가 왔다. 그는 경비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아들이 대신하는구나! 여긴 구직 젊은이가 많으니 이런 일도 있구나. 그래도 기특하다. 힘들 텐데….” 혼잣말을 했다. 아뿔싸! 대화 중에 그는 낮에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유니세프에서 6시에서 18시까지 일을 한단다. 야간 경비가 저녁 6시에 시작해서 아침 7시에 마치는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했더니 조금 일찍 가고 조금 늦게 시작하는 것에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럼 24시간 동안 근무하는 셈인데 잠은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주말(토,일)에 유니세프 일이 쉬니 그때 자면 된단다. 한밤중에 의자에 앉아서 잠시 조는 것만 가능한데, 낮에도 자기 일이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려 이 힘든 일을 택했다. 비록 한 달이지만 이렇게 하겠다고 나선 아들이 너무 위대해 보인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나는 과연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혹시 실직하실까봐 내 직장생활과 병행해서 잠도 안자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조차 못했을 것 같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아들은 아내가 있고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예식 비용이 없어 아직 결혼식은 못 올렸단다.

 

춤추는 신부: 9월 13일

11월 말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곳(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방문하신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는 언어연수를 받느라 프랑스에 있어서 뵙지 못해 많이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뵐 수 있게 되었다. 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빈국으로 꼽히는 이곳, 주변국들의 이권개입과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 결탁, 잦은 쿠데타, 소수의 급진 이슬람 세력과 이에 과민하게 대응하는 이들이 일으키는 폭동, 오랜 내전으로 살기 더 힘들어진 나라를 교황님께서 방문하신다. 요즘 라디오를 들으면 교황님 방문 소식이 자주 나온다. 가톨릭이 국교인 나라처럼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서인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중아공교회에서는 교황님 방문에 관한 행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세별로 성당마다 배당금을 정해주었다. 내가 있는 성 프란치스코 야 레성당은 큰 본당이라 500,000세파프랑(한화 1,000,000원 정도)을 배정받았다.

오늘 미사 중에 그 돈을 모금하는 ‘특별 봉헌’이 있었다. 매달 있는 ‘성전건립기금 봉헌식’보다 더 신나게 춤을 추며 30여 분간 봉헌식을 했다. 성당에서 여흥을 즐기는 동안 교우들이 셈을 하여 본당신부가 발표하였다. 463,335세파프랑, 배당금에서 36,665세파프랑이 모자랐다. 순간 본당신부가 봉헌함을 들고는 제단 앞으로 나가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본당신부의 열정에 교우들은 한 번 더 가난한 주머니를 열었다. 조금 전보다 더 신나게 노래와 춤을 추었다. 이미 다 털어낸 교우들은 제자리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지갑을 더 열 수 있는 교우들은 앞으로 나와 본당신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뭔가에 미친, 본당신부의 억지재치 열정으로 거둬들인 두 번째 봉헌금은 75,000세파프랑이 넘었다. 덕분에 평소 2시간을 살짝 넘기는 주일미사는 3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늘 하루의 신나는 봉헌식으로 교황님은 이 나라에 기쁘게오실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분명 ‘재화가 넘치는 곳의 심각한 경쟁과 불평등으로 인한 힘겨움’보다 ‘재화가 턱없이 부족한 곳의 열악한 공존의 살가움’이 더 행복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