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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4월 2일 사순 제5주일 : 요한 11,1-45 또는 11,3-7.17.20-27.33ㄴ-45.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3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죽었던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불러내셨습니다. 어두운 동굴무덤에 안치되어 있던 죽은 라자로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라자로가 무덤동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죽은 이를 감쌌던 천을 몸에 감은 채 그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장사를 지내느라고 그의 얼굴도 천으로 싸여져 있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그 사람, 죽어서 장사를 지내느라고 묶어놓았던 천을 예수님께서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자유롭게 걸어가도록 묶여있던 천을 다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님은 살려내셨습니다. 어두운 무덤동굴에 갇혀있던 그를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빼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묶여있던 그를 자유롭게 풀어주셨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사람에게 마지막 최후가 되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영원히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죽음이 끝까지 판을 치도록 놓아두지 않으셨습니다.

복음 말씀을 통해서, 아니 이 사순절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정작 무엇을 바라시는 걸까? 왜 여러 차례의 기적들을 보여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마저 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여주셨을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놓치지 않아야 할 물음입니다. 놓쳐서는 안 될 물음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사순 시기에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결국 어디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자신입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라자로를 살려내시면서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제대로 알고서 믿는 것인지? 그저 소문으로만 듣고 믿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이 사순절 내내 그걸 나한테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라자로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광경을 들으면서 그냥 한 쪽 귀로 흘려버리시진 않으셨는지요? 그건 2000년 전 성경 속의 이야기일 따름이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반문하신다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본뜻은 아직도 나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올해도 사순절만 그냥 지나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물음을 묻고 싶어 하신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기적을 다 보여주었어도 참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입니다. 늘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닥치면 쉽게 주님께 등을 돌리는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그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을 땐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하고 쫓아다니던 수만 명의 사람들도 주님의 고통과 십자가 아래서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순 기간 내내 다양한 복음을 통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정말 믿느냐?” 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묻고 계셨던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지고 갈 피눈물의 십자가 속에서도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는 다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기꺼운 맘으로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순절은 새로 살아나는 것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이 사순절은 묶여있는 우리가 풀려나는 것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이 사순절은 빛으로 걸어 나가는 시기입니다. 밝은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유로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월 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태 26,14-27,66 또는 27,11-54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 | 가르멜 수도회 한국관구장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총독이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2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14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18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20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23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25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27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28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29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30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33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34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37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39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40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42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43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우리는 ‘성주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성주간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구원 역사의 핵심적 사건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성주간의 시작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속에서 그동안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 특히 제자들의 맏형인 베드로의 모습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우리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기 전의 베드로를 보면, 그는 예수님과 만찬을 나누며 당신이 곧 붙잡혀서 수난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죽기까지 당신을 따를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오만함’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붙잡히던 위기의 순간, 베드로는 도망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온갖 고초를 겪고 있을 때 그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제자인가라는 물음에 세 번이나 부인을 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제자 됨’에 대한 부인이자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 그만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복음에 비해 루카 복음의 묘사는 아주 구체적입니다. : “슬피 울었다.”, “뜨겁게 울었다.” 사실, 그는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슬퍼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스승을 부인했던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울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한참 자신을 방어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바로 그가 있던 대사제 저택 안뜰 한편에는 예수님이 갖은 조롱과 고문을 받고 난 후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체절명의 순간,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를 지긋이 바라보셨다고 루카 복음 22장 16절은 전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통교하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그분의 눈길에는 그를 향한 무언의 야단이나 비난 또는 야속함이 묻어나지 않았을까요? “그것 보아라. 내가 예언한 대로, 너는 결국 나를 철저히 배반하지 않았느냐. 넌 정말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제자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그분의 시선은 애정 가득한 눈길이었고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 “난 결코 베드로 네가 잘났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란다. 비록 네가 나를 그렇게 배반할 것을 알았지만, 그리고 지금 그렇게 나를 배반했지만, 난 아직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니 전보다 더 마음 깊이 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잘 사랑하길 원했을 것이고 또 그분께 충실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슬피 울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자기가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외되어 있음을 느끼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소외된 베드로를 조건 없이 받아주고 계십니다. 그럼으로써 그 소외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대의 소외는 죽음입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살아 있지만 사실 죽은 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때,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내 눈길을 바라보렴.” 나도 나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바로 그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사랑 받는다고 느꼈을 때 인간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 자신(miseria: 비참한 존재)을 알고 또 하느님(misericordia: 자비하신 분)을 알 때 가능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재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는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잘 따르고 있습니까?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 : 요한 20,1-9.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내가 죽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못 드는 부활절 아침

 

나는 죄인이어도

당신이 사랑이어서

또다시 나를 살게 하는

찬미의 힘찬 노래

거듭나게 하는 노래

 

알렐루야 알렐루야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님의 ‘부활 소곡’이라는 시의 후반부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구절이라 많은 분들과 이렇게 나누고 싶었습니다. 지난 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 부활 대축일 성야 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함으로써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예수님의 부활은 나와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물론 사순시기 동안 얼마나 준비하며 지냈는지에 따라 각자 부활의 의미가 달라지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지나가는 듯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는 단숨에 무덤으로 달려왔지만,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과 아마포가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이란, 예수님의 흔적을 빈 무덤과 같은 고요한 우리의 마음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것 못지않게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인 줄 알아라.”(시편 46,10)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체험은 작은 것에서부터 옵니다. 또다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기쁨, 세상의 아름다움 앞에서 드리는 찬미, 소유하고 있는 것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줄 아는 지혜, 가까운 곳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 스스로의 잘못을 용서받고 다른 이들을 먼저 용서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 부활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가 새롭게 거듭나면 날수록 부활은 삶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삶으로 체험한 내가 달라지는 것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또한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을 품는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부활은 그만한 힘을 가졌습니다. 진리와 생명, 정의와 자비라는 예수님의 흔적들이 이제는 세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과 세상과 악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그제서야 분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4월 23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요한 20,19-31.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ㄴ)

모두가 다 본 것을 나만 보지 못했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그 사건이 중요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피- 하며 지나가겠지요. 그러나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어떤 것이라면 너무 안타까워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까요? 예수님의 부활 2주간을 보내면서 토마스 사도의 안타까운 마음을 유추해봅니다.

 

주간 첫날,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있던 제자들 한 가운데 오셨던 예수님. 그러나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만 없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25절)하는 증언을 들어야 했던 토마스 사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데 설혹 그것이 꿈이라 해도 자신만 뵐 수 없었다니 그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사도는 확고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분의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 하겠소.”(25절) 때때로 우리는 믿을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하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운명을 함께하겠노라고 약속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방관했고, 도망쳐 숨어 있었습니다.(19절; 참조 요한 13,37) 그런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니, 정녕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계신 분으로 오시길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괴롭고 암담한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26절) 잠겨진 문처럼 닫힌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열듯이 주님께서 오시어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십니다.(27절) 주님의 평화는 불신을 신뢰로, 죄의 상처를 용서로 치유하며, 닫힌 마음을 수용에로 열어 놓은 희망과 기쁨의 인사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듯이(20절), 다시 토마스 사도에게도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하십니다. 주님의 못 자국을 보고,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향해 다시 열려진 마음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고백합니다.(28절)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라고 하십니다. 나의 신앙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이어야 된다고 고집하십니까? 아니면 성령의 감도를 받고 기뻐하며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실천하는 신앙입니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ㄴ절)하고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ㄴ-23절)라고 하십니다.

 

형제자매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은 ‘용서와 치유’입니다. 내가 그의 죄를 용서할 때 그가 용서받고,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을 때 그는 죄 중에 머물게 된다니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요? 이처럼 죄는 우리를 닫혀진 문처럼 소외로 이끌지만, 용서는 화해와 사랑으로 치유하며 죄를 씻어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사랑에로 봉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나에게 죄를 지은 이웃을 ‘용서’하는 사랑의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매일 드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나도 용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6,12) 사랑의 용서와 상처의 치유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내시는 “평화” 속에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불편에로 몰아넣는 장애가 있다면, 자! 한 번 주님을 향해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시편 95,8-10)

 

 

 

 

 

4월 30일 부활 제3주일 : 루카 24,13-35.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3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펼쳐진 한 장면 장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각자 자신이 처한 입장과 상황에 따라서 묵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복음 말씀이라 많이 들었고 많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던 정보나 지식을 모두 내려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 자신의 상태를 통해서 저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안다는 것과 진짜 안다는 것의 차이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최근의 이야기와 정보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에 일어난 빈 무덤의 소식까지도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다음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단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진짜 안다는 것”은 정보나 지식을 요구하는 머리가 아님을 말입니다. 만일 그들 자신들의 생각대로 참으로 예수님을 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우스꽝스럽게도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다 동원해서 예수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장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진짜 아는 것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30리 봄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잔잔한 감동으로 우리들 마음에 전해집니다. 30리 길을 걸으면서 들려주신 얘기라 제법 많은 말씀들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마음을 울려주는 그런 말씀들이셨겠지요. 엠마오까지 나란히 걸어오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을 겁니다.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땐 어느새 저녁노을이 붉게 깔리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든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고맙기도 해서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라 집에 들어가십니다. 저녁 식사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그 순간 제자들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십니다. 그들의 온 몸은 거룩한 전율에 감싸이면서 떨고 있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의 입에서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아, 바로 이분이 예수님이셨다니!” 회개와 기쁨이 교차됩니다. 낮에 있었던 그분과의 동행길이 다시 떠오릅니다. 또 다시 깨닫습니다. 낮에 나란히 걸어오면서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자기들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었는지를! 어쩜 그토록 몰라볼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저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진짜 안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무엇이 그분을 몰라보게 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입니다. 예수님의 최근 소식과 정보까지도 제자들에게는 호기심거리가 되었을지언정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낮 동안 줄곧 함께 동행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씀들을 전해 주었건만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앎은 머리로써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따지고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선 마음의 확신이 서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마음의 확신,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참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해주었던 것입니다.